수 13:1-6 하나님은 유업을 이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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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유업을 이어가신다.
여호수아 13장 1-6절
여호수아서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눠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12장은 전반부이고 13장에서 24장은 후반부입니다. 이번 장의 본문인 13장을 산으로 말하자면 정상부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결말을 향해 내려갑니다.
오늘 본문 1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본문을 보면, 역시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여호수아 서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호수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3장은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수아 이야기로 시작해서 나머지 전체는 모세 이야기입니다. 8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
모세가 등장하고 끝나는 절까지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구조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지만, 여전히 얻을 땅이 많이 있다.” 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뜬금없이 모세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나이를 대략 90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습니다. 이제 20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여호수아는 얻을 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여호수아가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여호수아가 죽으면 큰일이 나니깐, 빨리 땅을 차지 하자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초점은 여호수아가 갈 때가 다 됐는데 아직 얻어야 할 땅이 많아서 큰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말고 가라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은 싸움도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이 사실상 가나안 정복에 대한 이야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모세에 관한 기록이 뒤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은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고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시고, 여호수아를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경을 가만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늙어 갈 날이 가까웠고 남은 땅은 많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래온 것처럼 내가 이 싸움을 계속 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도 지나갔습니다. 여호수아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나갑니다. 이 땅은 모든 사람은 다 지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늘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나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믿음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3장 15절에서 강조하는 부분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입니다. 모세는 리더이고, 여호수아도 리더지만, 우리는 그 리더십의 기원이 누구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도 여호수아도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분명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지, 그들이 스타가 되거나 영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그렇습니다. 마치 나의 리더십으로 된 것 같아 보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힘으로 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내면에 지금까지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믿으십니까?
지금 모세도, 여호수아도 살면서 자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은 하나님이 조상 적부터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이루시고자 한 그 약속을 순종하고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수아 5장을 보면, 여리고를 바라보면서 여호수아는 칼을 빼들고 있는 장관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수아 5장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사람은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무엇이 옳은지에 관심이 있지 않고, 나한테 이익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기브온 백성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조약을 맺었습니까? 그들은 옮은 것이냐, 틀린것이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상대방이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한 질문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칼을 빼든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와 군대 대장으로 왔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식으로 이해하면, 천군 천사로 구성된 하늘 군대의 대장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러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군대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묘사합니다. 놀랍게도 군대 대장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장으로 직접 지휘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친히 우리의 대장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분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앞서 가시면서 모든 것을 물리치시고 이겨 놓으시면 우리는 그 뒤에서 전리품을 챙기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 13장 전체에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수아야, 너는 나이 많아 늙었는데 남은 땅이 많다. 하지만 걱정마라. 내가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며 승리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보며 찬양하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고백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공허함이 찾아오고 때로는 짜증나고 피곤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연습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앞서 행하시는 걸음을 좇아가는 연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안 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닏다. 나 아니면 안 되는 것 같고, 내가 다 간섭을 해야 할 것 같고, 내가 다 이루어야 할 것 같아 보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도 나이 많아 늙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끊어지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자신의 땅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이 롯과 같이 살았는데 문제가 생겨서 헤어집니다. 그런데 조건적으로 봤을 때, 롯이 잘 살아도 백 배는 잘 살아야 되고, 아브라함은 힘쓰고 애써서 겨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을 보면 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부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남아 있지만, 롯은 여러 몇 번 죽을 뻔하다가 전부 잃고 겨우 구원을 받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롯은 스스로 잘 살아보려고 정말 열심히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살 땅도 찾아 보는 등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 땅이 얼마나 좋았는지 성경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롯은 그 땅에 가서 장사를 하면 잘 될 것 같아 보여 그곳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망하게 됩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있던 자리에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롯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던 중요한 차이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기자는 정확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13장 9-10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히브리 문법에서 ‘눈을 들어’라는 표현은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 인생의 앞날을 조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든 주체가 롯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대조되는 기록이 14절에 나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롯도 눈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눈을 들었는데,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주체적으로 눈을 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롯의 근본적인 삶의 길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붙잡아야 할 중요한 사고입니다. 결국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고 이루시는 승리를 우리가 목격하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임을 믿으시기바랍니다.
“롯이 눈을 들어, 너는 눈을 들어” 결국 우리 인생의 주체가 누구십니까? 바로 온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어서 무슨 말씀을 하는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29절). 멍에를 지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예수 믿는다고 자녀가 공부를 갑자기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때마다 진급하는 것도 아니고, 복권이 당첨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힘든 것, 어려운 것을 다 겪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멍에를 벗겨 주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멍에 지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쉽고 즐겁게 메고 가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의지와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전부 빼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길을 목자를 따라가는 양처럼 졸졸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양이 혼자 앞서 가 보겠다고 난리를 친다면, 목자인 예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무엇 때문에 혼자 그 무거운 짐을 다 지고 살아왔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고 모두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물 흐르듯 임하시는 성령님의 만지심과 하나님의 부요가 채워질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한번 맛본 사람은 대낮에 술 취한 사람처럼 히죽이죽 웃는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맛본 사람만 압니다. 험한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충만한 은혜와 부요를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