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7:14-18 개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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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복을 나누고 흘려 보내라.
여호수아 17장 14-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셉 족속이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자신들의 몫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17장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그러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요셉 족속이 여호수아에게 한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복을 많이 받은 민족인데 왜 이것밖에 안 줍니까?” 이것을 오늘날의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왜 맨날 이 모양 이꼴로 살게 나두십니까? 복을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맞다. 네가 말한 대로 너는 복을 많이 받은 존재다. 그러니 가서 개척을 하거라”
이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가 들을 때, ‘선교를 하러 나가라는 이야기인가? 개척교회를 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개척하라’라는 말은 요셉 자손에게 명하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우선, 우리는 요셉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은 나이가 많이 들어 하나님 앞에 갈 날이 가까워 오자 요셉에게 축복해 줍니다. 아들 요셉을 보니 아버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급한 나머지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을 아버지 앞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야곱이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아들... 이렇게 아들 하나하나에게 복을 빌었는데, 드디어 요셉차례가 왔습니다. 그러자 요셉에게 이렇게 축복해 줍니다. 22절을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인데, 이 가지가 샘 곁에 있으면, 가지가 마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성했던지 그 가지가 담을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 차원에서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흘러가는 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넓고 평탄한 상태에서 받은 복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23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느냐”
이 구절은 요셉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일생이 어떠했습니까? 말씀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항상 사람들이 그를 학대하고 미워하고 죽이려 했다. 지금 이것은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의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었던 것은 그에게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전능자, 즉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힘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복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라고 말합니다. (개역한글) 이 예언 때문에 요셉의 일생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에게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요셉의 일생을 통해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하시는 중요한 이유는 요셉을 통해 메시아의 그림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선 25-26절을 읽어보자.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여기까지가 요셉에게 빌었던 야곱의 복입니다. 이런 복을 받기를 원합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에게 빌었던 이 복이 갈수록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고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노골적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약속하시는 구절이 신명기 33장 13-16절에 나옵니다.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데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여기서 또 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복을 주지 못해서 애를 태우시는 분 같아 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전부 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창세기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심화되고 강화되었습니다. 그런데 16절 말씀에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형제 중 구별한 자”라는 말이 나온다.
요셉에게는 여러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에게 요셉은 미움의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을 나타내 주는 중요한 상징인데, 미움을 받는 데서 나아가 죽음을 당하려다가 애굽으로 쫓겨납니다. 이처럼 요셉은 형제들 중에서 미움을 받고 쫓겨난 자라는 상징을 가진 존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요셉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아서 그 형제들을 다 살리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셔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형들에게 미움 받아 쫓겨난 요셉이 그 형들을 살려내셨습니다. 그 요셉이 상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표현합니다. 건축자들이 건축을 하다가 버리는 돌은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자기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나 백성들이 땅의 주인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 짓는 방법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그들은 머릿돌부터 놓고 집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머릿돌에서 집이 완성이 됩니다. 그러니깐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의 처음과 끝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역할을 상징하는 그림을 요셉이 맡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을 산고 끝에 꿈을 이루고 성취해 낸 사람, 즉 성공지향적인 모델로 설명하거나 이해하지만 성경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미움받고 쫓겨났지만 부요케 되어 민족과 만민을 먹여 살린 사람, 요셉이 맡은 배역은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요셉에게 주겠다고 하는 원천의 복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알려면 먼저 요셉에게 약속된 원천의 복의 진의를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일대기에 대한 성경 기록에는 요셉이 형통케 된다는 말이 두 곳에서 나옵니다. 한곳은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보디발의 집에 팔아 보내시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고 합니다. 또 한 곳은 하나님이 그를 감옥에 넣으신 후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형통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형통과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시는 형통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형통이 무엇입니까?
쉽에 이야기하면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그 고통의 세월 속에 함께 계셨고,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의 세월 속에 함께 계셨으며, 그 이전에 요셉이 종으로 팔리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고 말합니다. 하늘 영광 보좌에 계신 부요한 자인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어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는 의미를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고 몸도 건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직접 내 속에 들어오셔서 살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천적인 복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뒤죽박죽 형편없는 세월 속에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끝내신 것이 아니라, 아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속에 내주하여 충만히 거주하신 것입니다. 이런 원천의 복 앞에서 내가 가진 것이 있다가 없어지거나 열 개 가졌다가 두 개 가지게 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 경계선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깐 요셉 지파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으면서 땅을 더 달라고 엉뚱한 애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개척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8-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아직도 저 경계선 밖, 절벽 같은 삶의 자리에 앉아서 이 원천의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개척하라”의 히브리 단어는 “베흐” 라는 동사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cut down” 즉 “나무를 잘라서 길을 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직 길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대로 보여주고 그들을 섬기고 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요셉 족속에게 주셨던 것처럼 원천의 복을 주셨습니다. 전부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를 가진 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이 어마어마한 보배로운 가치를 세속적인 가치와 자꾸 비교하면서 그것을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돈도 맡기시고, 건강도 맡기셨습니다. 왜 맡기시는 것일까요? 요셉의 삶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삶이 어떤 삶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내가 가진 것을 놓고 얼마나 이웃에게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길 잃은 영혼들을 향해 개척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내게 주신 복을 흘려보내고 나누어 주고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척의 삶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요셉에게 재물도 주시고, 높은 자리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요케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안에서 그런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개척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냄으로 형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