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6:15-21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호수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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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호수아 6장 15-21절
본문 15-1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여리고라는 성은 아주 견고한 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직접 사령관이 되셔서 백성을 지휘하시는데, 앞뒤에 이스라엘 백성을 배치하시고 중앙에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을 배치하셨습니다. 그 법궤 앞으로 나팔수가 있었습니다. 7명의 나팔수를 뽑아서 하나님이 나팔을 불게 하시는데,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행렬은 전쟁을 위한 행렬이 아니라 커다한 하나의 제사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팔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양각 나팔을 불고, “소파르” 평안을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성 주위를 돌고 7번째 되는 날에는 7번 돌면서 소리를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리고 성을 무너 뜨려야 합니다. 여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팔을 분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습니까? 이 나팔의 의미는 “평화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나팔의 의미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기 시작했다는 선업입니다. 회복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은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이 아니면, 진정한 승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도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17절 말씀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말씀을 보니깐,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이 말씀을 단순하게 이해를 하면 ‘바치다. 드리다’ 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17절에서 ‘살리라’는 말과 반대 개념으로 쓰인 단어는 ‘바치라’입니다. 한 구절 속에 반대 개념을 가진 두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살리다’의 반대말은 ‘죽이다’입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바치다’ 말과 ‘죽이다’는 말은 동의어가 됩니다. 결국 이 말씀에서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신 명령은 곧 모두 죽이라는 뜻이 됩니다. 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히브리어로 “바치다”는 “헤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헤렘”은 금지된 물건, 사용을 금함으로써 봉헌하다 의 뜻을 가지는 단어로, 하나님께 “헤렘” 으로 드려진 것은 사람이든, 생축이든, 토지이든, 사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며 모두 진멸되어야 했습니다. 즉, “헤렘”은 한 지역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제의적 용어로그들을 진멸하는 것은 완전한 거룩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즉흥적으로 내린 명령이 아니라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20장 16-17절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하나님이 왜 이런 아무 무자비한 진멸을 명령하셨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분명하게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8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나님이 가나안 진군을 앞두고 젖먹이 아기까지 다 죽이라고 할 만큼 무자비한 명령을 할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들어 있는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본토, 친적, 아버지의 집은 갈대아 우르인데, 이곳은 메소보타미아 문명권으로 ‘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르는 놀음의 본산지라는 뜻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아브람의 육신적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일방적으로 그를 불러내십니다. 그러고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땅이 어디입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2절을 읽겠습니다.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의 근원’ 이라는 말은 복을 받아서 창고에 가득 채우고 나 혼자 먹고 마시며 누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근원’이라는 말은 ‘뿌리’의 개념이 아니라 수도꼭지를 틀면 파이프를 타고 물이 나오듯 하나님의 복이 이렇게 흘러 넘치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과 지위와 이 땅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고 시간과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하시고 불러내신 목적, 우상을 섬기던 집에서 우리를 불러 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이름을 창대케도 하시고 지위를 높이기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얼마나 하나님의 결단과 의지가 강렬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가나안 땅 백성들을 위한 축복의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우상이 가득한 땅을 위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은 그들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었고 그의 인생에 설계하신 계획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가정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그곳의 축복의 통로로 만드시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도록 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5장 16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는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가득 찼을 때 그들을 들여보내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가나안에 갖고 계신 계획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는 것 자체는 땅을 저주하고 진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땅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즉, 아모리 족속, 가나안 땅의 백성들의 죄악이 가득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 그 땅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 죽이게 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죽인다의 뜻입니다. 이 ‘죽인다’라는 의미에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부분을 찾아 보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27장 28절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바친 것’ 즉 죽인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라는 것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실력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유일한 근거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따라서 법궤를 중심으로 그 앞에 평안을 선포하는 나팔수, 즉 제사장이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이 법궤 위에 부어질 어린양의 피로 이 도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선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2천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실 때 우리도 그 속에서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안되는 우리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은혜의 보좌 앞,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린양의 죽음으로...
따라서, 가나안 땅은 먼저 죽음이 임하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 없는 땅입니다. 그것은 누가 죽으신다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땅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이 성을 도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전제되지 않는 거룩함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에서부터 우리의 거룩이 시작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땅,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셔서 아브라함의 비전을 갖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비전이 무엇이었습니까? 지금도 우리 삶의 주변을 돌아보면 죽음의 땅, 생명 없는 영혼들이 안팎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 이 자리에 우리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통해 생명의 복음이 증거되고 전파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그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일어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여리고와 같은 황폐한 땅, 영혼의 불모지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거룩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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