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6:1-11 평화를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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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선포하라.
여호수아 6장 1-11절
신학자 존 햄린은 그의 책 [땅의 유산]에서 여호수아를 해석하는데,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수아서가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의 패러다임(지침서)이고,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호수아 1장부터 5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스라엘의 여정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1장부터 5장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셨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하신 것도,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도 모두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죽음 이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바톤을 이어받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담대하라, 강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리라” 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런 한 가운데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건너갈 수 없는 요단강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제사장들의 어깨에 메워 요단강에 발을 담그면 물이 갈라지는, 마치 홍해가 갈리지는 것 같은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도착한 것 같아 보였지만, 하나님은 잠깐 멈추고,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적군이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군에게 무장해제와 같은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여호수아를 통해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할례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 앞에서 여호수아를 향해 칼을 빼들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제 생사를 건 결단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이제까지 광야에서 네가 네 인생의 주도권을 잡고 살아왔지만, 가나안 땅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야. 그래서 내가 이 공동체, 즉 하나님의 군대의 장관으로 왔다” 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을 벗는 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내가 무언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권리와 책임을 내려놓고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드디어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 앞에 섰습니다. 이 성은 이중벽으로 둘러싸여서 좀처럼 함락시키기 어려운 요새 중의 요새입니다. 고고학자들의 의하면, 여리고성은 이중성벽으로 되어 있고, 약 4m 정도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또 다시 4m 진흙 벽돌로 이루어진 견고한 성이었다고 합니다. 언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본다면 20m 정도 달하는 거대한 성읍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께는 6.8m 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포를 쏴도 무너지지 않는 두께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세계 전쟁사를 보면 수많은 전쟁의 명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명장의 명성에 오르게 된 전략의 출처와 근거를 뒤져보면 뜻밖에도 바로 여호수아 6-11장에 나타난 전쟁의 원리를 실전에 적용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나폴레옹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리고 근대 전쟁사에서 에드먼드 알렌비라는 영국의 유명한 사령관은 자기 이름을 붙인 알렌비 전략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승리했는데, 그 전략의 출처가 전부 여호수아 6-11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계 전쟁사에서 화제가 될 만큼 여리고는 무너뜨리기 힘든 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먼저 무너뜨려야 하는 성입니다.
지금 여리고 성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성문을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요하지만 살벌하기도 하고 긴장감을 주는 폭풍 전야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아주 철통같은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여리고성과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저히 내 상식, 내 판단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 여리고성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칼을 빼들고 우리의 대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략이라고 내놓으시는 것은 하나의 어떤 놀이를 연상시킵니다.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2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직 전쟁이 벌어지지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성경 기자는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뜻밖에도 이런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이러한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1장 3절 “너희 발바닥으로 밝은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아직 차지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 밝은 곳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적들을 넘겨주었으니 그럼 이제 된다는 것일까? 안 된다는 것일까? 이것은 될 수 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제사장 일곱 명을 뽑아 오라고 명하십니다. 군인이 아니라,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앞에 세우고 양각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그 뒤에는 나팔부대 뒤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비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하나님의 군대라 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전쟁을 준비하는 배치 입니까? 누가봐도 이것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앞에 일곱 제사장으로 구성된 나팔수가 서 있습니다. 구약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하초츠라’라는 단어입니다.
이거은 나팔을 분다고 할 때 보편적으로 쓰는 단어가 이것인데, 말 그대로 ‘전쟁을 하자’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단어 ‘소파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쓸 때는 전쟁을 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쟁을 하다” “이 땅에 이미 평화가 왔다” 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본문에서는 ‘하초츠라’라는 단어가 아니라 ‘소파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이라는 요새 앞에서 전쟁의 개념과는 상관없는 ‘소파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할 것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나팔부대 뒤에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습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 배치는 전쟁을 위한 작전도 아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한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제사를 보여줍니다. 민수기 10장 7절에 보면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 나팔을 군인이 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론 자손이 불도록 명하셨습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왜?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평화를 선언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에 의해서 불게 되어 있는 이 나팔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희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며 그로 말미암아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정치적인 평안, 경제적인 평안, 힘의 균형에 의한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물리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죄가 끊어지고, 악의 세력이 물러가고 어둠과 저주가 떠나간 상태에 임하는 온전한 평안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의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네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은 이사야 61장을 인용했는데, 여기서 인용된 “자유”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페시스]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희년의 해방을 의미하는 단어로 구약에서 40번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 사회적 해방 뿐 아니라 종말론적인 죄 용서에 대한 해방, 영적인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하고, 눈 먼자 그리고 눌린 자를 해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평안을 주시기 위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뭐라고 찬양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평화는 우리 영혼이 모든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되는 평안, 흑암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고 살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던 평화, 바로 그런 온전한 평화를 말합니다.
많은 염려와 근심과 걱정 속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를 파헤쳐 보면, 결국 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으로는 아무리 평화롭게 보이더라도 어린양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기인한 평화가 아니면 그것은 진짜 평화가 아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내 가슴 깊은 곳에 마치 여리고 요새와 같은 모든 죄악의 도성이 무너지는 바로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온전한 평안, 완전한 자유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와 평안을 경험한 사람들은 담대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이러한 선언을 하는 것이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린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이 도성에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뒤를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 뒤에 백성들이 따라가는데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침묵을 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하신 것입니까?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만과 불평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 불만과 불평의 모든 원인은 불신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침묵하라는 어찌 보면 매우 엉뚱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이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만 했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또 원망과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52장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끌려가실 때, 어린양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하신 말씀은 한 마디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이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찢으신 것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 졌습니다. 순종하며 끝까지 침묵으로 성을 돌았던 자들만이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기적을 베푸셨던 사건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결혼식은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일생일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쁨의 상징으로 신랑과 신부가 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포도주는 빠져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잔치가 중단 될 위기가 처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원래 하나님께 지음 받을 때부터 잔치를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연락하고 교제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잔치가 끊어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절망이 찾아오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고난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고통의 바다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잔치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지금 누가 초대되어 계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 계십니다.
잔치가 중단되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 여기서 “여자여” 라는 말은 어머니를 비하는 말이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극존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요청을 안 들어주실 것처럼 하셨지만, 결국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비범함을 아시고 그 정도 기적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거절합니다. 이 거절 속에는 이런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머니, 아무리 존경하는 어머니의 부탁이라도 나는 이 땅에 온 이유가 이런 육적인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끊어진 잔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는 것은 어머니의 요구에 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는지를 상징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도주가 잔치자리에 나오자 사람들이 놀라며 반응을 합니다.
“보통 잔칫집 같으면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할 정도가 되면 맛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놓는데, 이 집은 나중에 나온 포도주가 더 맛있군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이제 중단되었던 잔치가 회복되었습니다. 그 포도주는 장차 예수님이 흘리셔야 할 십자가의 피를 상징합니다. 단순히 이 땅에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기적의 비밀을 누구만 알았습니까? 물 떠온 하인만 알더라” 하인들이 포도주를 떠서 상에 내었습니까? 그저 순종하며 물을 떠다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을 때 “물을 떠서 갖다 주면 혼날 텐데요”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물을 떠서 갖다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잔치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회복되는 잔치임을 나타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성을 하루에 한번씩 돌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전쟁을 앞둔 병사들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말 하지 말고 성을 돌라는 것은 무오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들이 순종했을 때. 마침내 요새가 허물어지는 기적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앞서 양각 나팔을 불게 하시고, ‘소파르’, 즉, 진정한 평안을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 재물로 심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어떤 삶의 문제 앞에서도 담대하게 평화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양각 나팔을 마음껏 불면서, ‘소파르’ 외치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기쁨의 잔치를 회복하는 승리의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