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0:16-21 내면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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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적
수 10장 16-21절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하나의 큰 상징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말씀하시는 구절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말씀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3절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밝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아직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미 밝은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완료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차지하게 하리라” 완료형과 미래형, 가나안 전체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시제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땅을 주셨고, 또 차지하도록 하나님이 마무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의 삶은 무엇가를 빼앗고,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곳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천국의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기복적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믿으면 병도 안 걸리고, 교통사고도 안나야 하고,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봤을 때, 가나안 땅은 이미 주신 땅임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는 이론적으로 전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들어가는 날부터 전쟁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재정문제, 건강문제 같은 외부의 적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적과 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룩한, 거룩하다” 라고 할 때, 우리의 수준을 말하거나 우리의 노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때, 항상 우리의 신분을 놓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로마서 9장 9-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구절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 사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심하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지금 복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두고 “택함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했다”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를 택하셨을까요? 간단히 대답하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내가 조금이라도 잘난 구석이 있어서, 가진 것이 많아서, 선을 많이 행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택함을 받았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는 뜻은 도덕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신분적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 주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별과 달과 해가 그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장차 하나님이 요셉을 대국의 총리로 만드신다는 계시였습니다. 요셉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를 장차 애굽의 총리로 세울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바로 총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부터 요셉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그가 겪는 것은 채색옷이 벗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사용이자, 보호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채색 옷을 벗게 되고 물 없는 구덩이게 던져집니다. 죽기 직전에 애굽 상인에게 팔려갑니다. 그는 결국 보디발의 장군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군의 아내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들어갑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요셉은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내 인생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시편 105편 16-17절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보다는 요셉이 종으로 팔렸다는 구절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재수가 없어서 팔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때, “재수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라고 스스로 자학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눈을 열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면 다른 것은 전부 시시해 집니다. 눈 앞에 분명한 결과가 보이는데 그렇게 난리칠 필요가 없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앞서 보냈는데, 요셉은 모릅니다. 어쨌든 요셉은 지금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18절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몸”은 히브리어로 “혼”을 뜻합니다. 요셉의 혼을 하나님이 쇠사슬로 묶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그의 인생 가운데 개입하셔서 그를 끌고 가시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의지를 따라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계획하셔서 요셉의 인생 가운데 개입해 들어오신 것은 그에게 국무총리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가 국무총리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고난의 학교를 통과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죄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영적으로 대각성을 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 동기가 무엇입니까?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왕의 자리가 무너지면서 보니 자기 꼴이 비참해 보였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눈물로 침대를 적혔다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5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인간은 불순물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풀무라는 과정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전쟁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속에 있는 더러운 것, 즉 내부의 것들을 잘라내야 하는 싸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