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3:1-3 공동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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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삶을 연습하라.
수 23:1-3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호수아 마지막 부분인 23장과 24장은 여호수의 유언이 담긴 메시지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두 편의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청중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3장은 리더들을 모아서 전한 메시지이고, 24장은 백성 전체를 모아 전한 메시지입니다. 리더들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교역자, 장로, 권사, 안수집사 같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이런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핵심리더 그룹이죠.
여호수아 23장은 그 리더들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인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신체에 비유한다면, 구약 전체에서 목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구약성경은 결국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내 말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입니다.
순종하여 복을 받았고,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음을 역사적으로 증거해 주는 이야기가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 여호수아 23장입니다. 특히, 23-24장은 집중적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복과 저주를 주신다”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는 복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명기 28장의 경우 전부 축복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를 방불할 만큼 저주에 관한 이야기도 많은 분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복의 언약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의 언약도 실현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시라면서 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저주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궁극적으로 저주로 간 적도 없고, 저주를 그대로 놔두신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똑같은 방편으로 사용하시는데, 결국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두 가지를 같이 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들어있는 하나님 중심 사상입니다. 여호수아 23장도 이 말씀입니다. 전반부는 복에 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저주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면 왜? 여후사아가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씀을 유언으로 남긴 것일까요?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기서 “쉬게 하신지”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는 “안식”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쉬게 하신지” 이 단어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에 빠지기 쉬운 기독교 사상이 많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에 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을 지으신 후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하셨을까? 거의 대부분은 ‘일 하셨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7이라는 숫자는 영원한 수인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은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후 7일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더는 손 댈 것 없이 충분하고 완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안식’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입니다.
‘안식’이라는 말의 중심 사상은 ‘완전하고 충분하다’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을 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보게 되면, 안식을 주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고 휴식을 주셨다는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입니까?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약속의 땅이라는 개념은 내가 싸워서 승리하여 얻은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근거로 내게 주신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가나안은 내가 싸워서 얻은 땅이 아닙니다. 나의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종들의 다툼으로 갈라설 때, 롯은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진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소돔과 고모라 땅입니다. 그런데 왜?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까요? 그런데 히브리적 사고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의 상식적인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통해 여호수아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유언이자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잘 먹고 잘 사게 된 것은 너희의 공로가 아니다. 첫째도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도 하나님의 은혜요, 셋째도 하나님의 온전하고 충분한 은혜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제부터 무슨 애기를 하기에 이렇게 거창하게 서두를 시작하는 것일까요? “이제 내가 얼마 안 남았으니 백성들을 잘 지도하고 타락하지 말고 열심히 살다가 나중에 보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23장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23장 전체에서 이상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같은 말이 한두 구절을 제외하고 구절마다 강조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3,5,8,10,11,13,14,15,16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23장은 16절밖에 안 되는 짧은 장인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이 무려 13번이나 나옵니다. 글이나 연설, 설교에서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좋은 문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23장 본문에서 한 두번 반복이 아니라 13번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이해하려면 먼저 여호수아가 어느 시점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여호수아가 생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가고 모세도 지나가고 그 길을 따라 나도 지금 갈 때가 거의 다 됐다. 이렇게 너희의 지도자들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있어야 교회가 잘 되고, 없으면 교회가 가라앉은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교회라는 이 신비로운 공동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가 지도자 그룹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사람이 이끄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들을 위해 과거에도 싸우셨고 현재도 싸우시고 앞으로도 싸우실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죽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더 강하고 견고한 진을 쌓고 적과 맞서 싸우라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에베소서 2장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완전한 안식을 누린 지 오래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되기까지 하나님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그들을 구원하셔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공동체를 설립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곳이 교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인생의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라는 공동체는 굉장히 신비합니다. 각양각생의 사람들의 다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아름답고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들만 있다면 무엇 때문에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겠습니까? 즉, 교회 속에 담긴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선교와 구제, 전도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은 그 일을 위해 씨름하고 애쓰는 가운데 신령해지고 거룩해지도록 하는데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훈련장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깨지고 상한 우리 죄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주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고 맛을 내주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소금이나 사랑은 독자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 발휘되어야 하는가? 원수가 있을 때 사랑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빛이 언제 필요합니까? 대낮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이 언제 필요합니까? 세상이 맛을 잃어버릴 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역할을 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신 신비의 경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 가고 있음을 늘 기억하며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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