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7:8-15 절망에서 소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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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소망으로 바꾸신다.
수 7:8-15
아간이 심판받은 원인이 무엇인가요? 단순히 바치라는 것을 바치지 않은 도둑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무슨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아간은 이것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아이성 실패라는 큰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간의 죄로 인해 자기 자신, 그리고 관계된 모든 것들이 죽임을 당해 골짜기에 무덤으로 이루게 됩니다. 이 무덤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아간은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체포되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서 그의 범죄를 낱낱이 이실직고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7장 21절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여기서 아간이 범죄하게 된 세가지 죄의 경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고’, 두 번째는 ‘탐내어’, 세 번째는 ‘가졌나이다’ 이 경로는 성경의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가장 완전한 공동체였던 에덴동산에 가장 완전했던 한 가정에 어떻게 죄가 들어오고 그로 인해 온 인류가 타락과 범죄에 빠지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6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도 죄가 들어오는 경로의 첫 번째가 “보고”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탐스럽기도 한” 그래서 세 번째로 결국은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서 그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간의 범죄의 이면에는 탐심이 작용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탐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굉장히 강렬하고도 집요하게 중한 범죄로 다루셨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십계명에 들어가 있다. 마지막 계명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럼 탐심은 어떻게 우리 심령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까? 마음속에 만족감이 없을 때 탐심이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 여덟가지를 주셨는데 그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탐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은 불만족을 의미합니다. 이 불만족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가나안 삶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누구의 힘으로 사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를 주셨으면 그 열가지가 복입니다. 여덟가지를 주셨으면 그 여덟 가지가 복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본분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탐심이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탐심이 얼마큼 대단한 죄이기에 아간과 함께 모든 것들을 골짜기에 묻고 돌로 죽이고, 이것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 15절에 보면 아간의 범죄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명하고 계십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첫째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 둘째는 아간이 자기 집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아간이 외투와 금 몇 덩이를 숨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깨고, 또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망령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망령되다’라는 말은 추상적인 단어로 히브리어로 ‘네빌라’ 라는 단어입니다. 이 ‘네빌라’가 동사로 사용될 때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행위를 말합니다. 지금 탐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탐심을 이렇게 확대하셨습니다. 따라서 탐심은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공급과 은혜로만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니 자꾸 다른 남자를 넘겨다봅니다. 그것도 모자라 부적절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망령된 일입니다. 결국 탐심의 문제는 단순한 도둑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고 다른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아간의 문제를 보면 아간을 한 번에 찍어내지 않고 제비뽑기를 몇 번이나 해서 유다 지파를 골라내고 세라 가문을 골라내고 삽디 가족을 골라내고... 피를 말려서 그를 뽑아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포감을 주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가? 성경에서 한 단어가 힌트를 줍니다. 여호수아 7장 21절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아간이 도둑질한 물건들이 “내 장막”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장막’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막’이라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나옵니다. 22-24절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들을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가지고 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으니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이 짧은 문단 속에 장막이라는 단어가 왜 이리 많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간의 죄는 아간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장막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장막’은 영어로는 텐트고 하우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가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장막 안에 땅을 파서 감출 정도면 그 가족들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죄를 한 사람의 죄로 규정하지 않으시고 장막의 죄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 죽이신 것입니다.
25-26절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 골짜기라는 지명은 바로 ‘아간’ , ‘아카라’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간이란 이름의 뜻은 ‘괴롭게 하는 자’ 쉽게 말하자면 ‘사고뭉치’입니다. 그래서 이 아골 골짜기는 괴로움의 골짜기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간과 함께 관계된 모든 것을 묻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오늘 이 아골 골짜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요? 죄를 지으면 이렇게 된다고 겁주고 경고하기 위해서 아골 골짜기로 7장을 마치고 있습니까? 아골 골짜기가 주는 주는 교훈을 호세아를 통해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 때문에 고통당한 선지자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선지자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이 아내가 바람기가 많았습니다. 집을 나가서 데려다 놓으면 또 집을 나가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선지자는 그런 아내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여자와 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끝없이 짝사랑하는 비련의 선지자가 호세야 입니다.
호세야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인데, 아내가 바람났는데 그 이유를 호세야 2장 4-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났는데, 그 이유를 보니, 연애하는 자가 먹을 떡과 옷과 물과 모든 것들을 준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그분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좇는 바람 난 여인과 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남편이 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바람 난 여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어떤 여자가 있는데 남편이 가져다주는 것을 가지고는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돈도 주고 필요한 것을 사줍니다. 그래서 자꾸 만나니 남편이 의심하면서 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친구로 만난다고 말합니다. 결혼한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부요한 신랑이 그리스도인데 우리는 딴 짓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바람 난 아내의 남편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6절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이 남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바람피우지 못하도록 가시로 길을 막기도 하고 담을 쌓기도 하면서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요? 이 분이 우리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도랑도 파시고, 가시 철망도 놓으시고 온갖 방법을 다 쓰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자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궁핍하고 아픔이 찾아온 것입니다. 바람 난 아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0-13절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은 탐심이 우상을 섬기는 문제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죄를 범하게 된 아내에게 호세아가 어떻게 하는지 14-15절을 보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수아에서는 아골 골짜기는 저주와 심판과 멸망의 상징으로 아간과 그 가족과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이 묻힌 곳입니다. 그래서 절망과 종말로 끝나는 것 같았는데, 호세아를 통해 보면 아골 골짜기는 소망의 문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저주였던 그 아골 골짜기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망의 문’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막연한 희망, 무언가를 소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망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티크와’인데 이것은 “줄” 을 말합니다. 그러면 소망이라는 단어 대신 “줄”이라는 단어를 넣어 말씀을 읽어보면 “거기서 비로서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줄의 문을 삼아 주리니” 가 된다.
‘줄의 문’ 여호수아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향해 진격해 들어갈 때, 여리고 성의 모든 것들이 심판 아래 있었지만, 라합과 그의 가족은 함께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근거가 된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줄이 내려진 문이었습니다. 슬프고 비통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라합은 창문에 달아 내린 그 구원의 줄, 소망의 줄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고, 오늘날까지 성경에 구원의 메시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마땅히 묻혀 죽었어야 할 곳, 아골 골짜기가 호세아 선지자로 상징되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소망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순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부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방황하여 흐트러졌던 지난 걸음들을 정리하고 아골 골짜기에서 마땅히 죽었어야 할 내 과거와 현재의 삶을 묻어 버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의 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갑시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면 꼴을 얻으리라” (요 10:7-9) 오직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구원과 무한한 자유와 이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초대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남은 생애 오직 그분만 섬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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