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10-18 요단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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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으로 들어가라.
수 1:10-18
이번주 말씀도 여호수아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금요기도회 시간에 여호수아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로 금요기도회는 부목사님들이 설교하기 때문에, 저에게 주어진 횟수는 24번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도 있지만,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주제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입니다. 저의 삶 가운데도, 사역의 현장 가운데에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지침서입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에서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바톤을 이어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낭안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곁에서 모세가 행한 일들을 모두 보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모두 보았습니다. 여전히 불신이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을 이끌고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제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냥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7절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평통 하리라”
이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나아갈 때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전통적으로 가나안 땅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우리가 장례식에 갈 때, 장례찬송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고, 그리고 나면 영원한 천국이 있다... 그런 정도로만 요단강을 이해합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우리는 가나안 땅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가나안이 어떤 곳입니까? 가나안 땅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분 밑에서 사는 삶을 훈련하는 장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선거리로 11마일이면 들어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을 무려 40년 동안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신명기 1장 2절에는 가나안의 거리가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11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40년 동안 방황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38년이라는 기록도 있고, 40년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어디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38년이라고 말할 때,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의 기간만을 따질 때이고, 홍해를 건넌 직후부터 따지면 40년이 됩니다. 38일이든지 40일이든지, 이 길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걷기만 하면 11일이면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40년 동안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방황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들은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일까요? 불순종해서 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각 지파대로 한 명씩 정탐꾼을 뽑아서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둘러보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뭐라고 보고합니까? 10명의 정탐꾼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수기 13장 27절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33절에 “우리는 스스로 보이에도 메뚜기 같으니...” 가나안은 우리 땅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민수기 14장 1절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들의 죄를 불순종과, 배반, 패역, 우상 숭배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시간을 쪼개어 절약하며 살아도 하나님 없는 삶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을 많이 써버려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인되시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낭비하는 인생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불순종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감히 광야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옛 습관, 관습, 고정관념, 불순종을 버려야 합니다. 요단은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기 위해서는 과감히 광야의 삶의 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요단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버리는 곳입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앞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을 버리는 장소가 바로 요단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1년, 1달, 1주일이라는 시간의 매듭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 시간을 통해서 그 매듭을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지난 한 주 동안, 지난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요단에 들어가는 것은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인 의미로는 맞지만, 이것이 내 삶 속에 매일 벌어지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설 때 마다, 그 요단에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도 매일 죽어야 할 ‘자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나의 불순종이 죽어야 합니다. 나의 교만이 죽어야 합니다. 나의 이기심이 죽어야 합니다. 나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얄박한 경험이, 지식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매듭의 시간을 주실 때마다, 나의 요단으로 들어가야 할 삶의 뿌리는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단이 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옛사람의 습성을 과감하게 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명하여 이르되”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백성의 관리들을 ‘유사’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소테림’이라는 히브리말인데 지휘관들을 말합니다. 군대에서도 모든 군인이 전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투병도 있고 작전병도 있습니다. 역기서 나오는 ‘소테림’이라는 말은 지휘관이기는 한데 전쟁을 하는 지휘관이 아닌,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행정 군인들을 이야기 합니다.
어느날 여호수아가 이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팔레스타인의 밤은 낮과 온도차가 심해 매우 춥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열두지파 백성들의 관리들을 전부 소집한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긴장된 눈빛으로 모닥불 옆에 전부 앉아서 초조한 마음으로 앉아 여호수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긴급한 명령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모였을 것입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11절)
여호수아가 관리들에게 내린 지시는 간단하고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우선 한가지 준비는 확실합니다. 그들은 진중을 두루 다니며 백성들에게 약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흘 안에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주시는 땅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준비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명령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부분을 보면 ‘들어갈 것임이니라’가 아니라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속한 땅을 너희가 3일 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그렇게 백성들에게 ‘말하라’ ,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준비를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준비해야 하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학교가 아닙니다. 교회를 운영하고 경영하기 위해서는 회의도 해야 하고 전략도 짜야 하고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로 믿음으로 가는 공동체입니다. 항상 이 기초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 백성들에게 먼저 선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3일 안에 조상적 부터 약속해 오던 이 땅을 들어갈 것이니라 하라”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준비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믿음의 선포가 있습니까?
북한의 평양 거리를 가보면 건물마다 이런 플랜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이 한목숨 총 폭탄이 되어 귈기하자” 이런 살벌한 구호들이 평양 거리를 뒤덮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다는 것이다. 결집과 응집을 시킨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지 이 한목숨 총 폭탄이 되어 수령님을 섬겨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도 이렇게 응집력을 주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선언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의 선언 후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준비시킨 것이 무엇이었나요?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비전을 주십시오” 기도했다면, 그 다음엔 실질적인 준비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포 다음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준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과 기대는 너무나 큰데 준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자들 가운데에서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채워 주시겠지. 물론 하나님이 채워 주시죠. 하지만 그 채워주시는 깊이와 넓이는 굉장히 다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2-13절을 읽어보자.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말이 무엇일까요? 땅을 준다는 이야기 입니까? 아닙니다.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지파는 모두 몇 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대로 12지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3지파만 나옵니다. 그중에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가 반쪽이 나는 바람에 그것이 이쪽에 반, 저쪽에 반 붙습니다. 그래서 므낫세 반 지파라는 용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두 지파는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삭의 축복을 야곱이 받게 됩니다. 이것을 안 형 에서가 분노해서 야곱을 죽이려 하니깐 어머니 르브가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삼촌 라반의 딸들을 아내로 맞는 과정을 통해 혼란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은 라헬이었습니다.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외삼촌을 위해 7년을 일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보내고 아침이 되었는데, 라헬이 아니고 언니 레아인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속임수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아닌 언니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 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또다시 7년을 하루같이 일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아내가 둘이고 아내의 여종까지 4명의 아내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나은 아들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 중 장남이 르우벤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기전에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는데 이렇게 소개합니다.
“르우벤은 다혈질이라 사납고 용감했다. 갓의 이름의 뜻은 군대인데, 항상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지파이다. 므낫세 지파 역시 용사들의 집안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 세지파,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 전쟁에 용맹한 집안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세월 동안 이 지파들은 항상 백성들 앞에 앞장서서 전쟁을 치른 지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얻은 재물들을 항상 많이 가지고 있는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이기는 대로 노획물을 나눠주다 보니 이 세 지파가 가장 많이 가져갔습니다. 그로인해 세 지파의 사람들 마음에 약속에 대한 열망이 점점 사라져 가기 시작합니다.
저 가나안 땅, 하나님이 우리 조상적부터 주기로 한 그 약속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민수기 32장 1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단을 건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땅에서 취할 수 있는 이익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상실해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습관처럼 교회에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들이 해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해 버립니다.
6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명령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민수기 32장을 보면, 모세에게 말합니다. 민수기 32장 4-5절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절,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말이야 좋게 들리지만, 사실 가진게 많으니,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니 여기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세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이렇게 말하면, 나머지 지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왜? 형제들을 낙심시키느냐?“고 모세가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의 일체감이 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을 타일렀지만 그들은 더욱더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고, 결국 그 요구를 들어줍니다.
지금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약속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것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절충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땅에 머무는 대신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본문으로 돌아와서 14-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그 땅의 정복이 다 끝나면 너희는 다시 돌아와서 이전에 너희가 원하던 지역에 살아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세 지파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16절을 보자.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그들은 호언장담했습니다. 어떤 이들을 이들의 대답을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13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세 지파는 그들의 말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쫓아내지 못하다” 가 아니라 “아니하였으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못한 것과 안한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 땅은 그들이 믿음으로 밟으면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못한게 아니라 안 했습니다. 왜? 그들은 쫓아내지 못한 것일까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편 기자는 106편 34-3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이방민족들을 멸하지 못했다가 아니라 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가 좋았던 것입니다. 죄악대로 사는 것이 자신들의 본성과 딱 맞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너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너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이 너무나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롯은 요단 지역을 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의 장소라 생각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한 도시였고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신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롯이 성공한 것 같았지만 거기서 아내마저 소금기둥이 되고 모든 것을 잃게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고 죄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러한 생각과 본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화려한 것, 눈에 좋은 것,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우리 안을 가득 채우고 싶은 욕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매일 잘라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우리안에 있는 불순종의 근성을 잘라버리고, 나를 다스리시는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인정하고 따라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고 나아간다면,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늘 승리와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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