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안다면 난 자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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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인사말-도입]
이번 한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샬롬! 이렇게 인사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잘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화평이라고 성경은 말하지요! 이 상태를 샬롬 이라고 합니다. 앞뒤 좌우를 다시 한번 살피고 샬롬!으로 문안하겠습니다.
오늘 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요8:31-59]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 50.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서론]
지난 시간 우리는 요한복음 8장을 보면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와 예수님에게 함정을 파고 공의냐? 사랑이냐?는 딜레마를 던진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살펴보면서 참된 증인이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8장은 이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계속적으로 질문과 응답이 지속됩니다. 오늘도 그 연장선에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을 먼저 보면 “(만약)진리를 안다면 난 자유할까? 라는 열린 주제입니다. 먼저 제목에서 살펴보듯이 진리가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이 주제 질문에 우리는 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사실이나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4복음서를 보면서 거의 매일 살펴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저와 여러분은 대답이 궁색해 집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타종교와 비교하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죄를 깨닫고,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쫒아 열심히 노력하여 도를 이루려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도무지 스스로는 의로워 질 수 없는 철저히 부패한 죄인이라는 절망가운데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 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는 내가 깨달음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 안에서 발견되려고 그분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무언가 선을 행하고 그런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것입니다. 그분의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분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로고스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경험하고 쓴맛 단맛 모든것을 함께한 경우를 말하듯이 말입니다. 마7:22-23(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제약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죄 지을 자유를 말하는데 이것처럼 우스운 아이러니가 없습니다. 이런 자유는 하나님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우리는 자유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처구니 없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은 신자들이 자유를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는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술 먹고 담배피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가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자유, 자기의 욕정과 뜻대로 살아가도 회개하거나 죄책감을 지니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이런 것을 꿈꾸는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죄에 노예가 되어 살아도 당장의 먹고 마시는 것을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착각이고 거짓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고난 당했습니다. 이런 자유는 세상 사람들의 자유입니다. 사탄에 속한 사람들의 일시적이고 감각적이고 제한적이며 유한한 자유일 뿐입니다. 그 결과는 사망과 심판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은 죄와 싸우지 않을 자유를 갈망합니다. 왜?내 안에 죄 된 욕망이 있어서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게 해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까? 제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데 이 죄의 유혹에서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유를 꿈 꿈니다. 오늘 본문 31-32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직접 우리에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안에 거하면 그 진리는 우리를 반드시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더 깊고 본질적인 자유에 대하여 본문 말씀으로 같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죄로부터 원수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얻는 것 입니다.
[본론]
자유라는 개념을 말할 때 성경은 선택을 같이 다룹니다. 선택이 없으면 보통 자유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에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시기에 화란의 인문주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발표 했습니다.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죄를 선택할 의지가 타락한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자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 책을 거의 4배 분량으로 까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노예의지론’ 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오직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의지적으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인간은 태어나서 죄 짓는 일이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노예의지라는 것입니다. 죄에 노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맞는 것 같습니까?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번역하였지만 종교개혁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선’을 동원할 때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칼을 들이 밀지 않습니까?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던 돌을 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마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는 말에 모두 사라집니다. 보통 죄를 깨달었다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구원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들은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주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깨달어서 “아! 이것이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아! 방법이 없구나 어찌할까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하는 것입니다.
23절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주님의 선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 죄에서 자유 하다는 생각,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은 신앙의 커다란 걸림돌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짓기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짓는 족속이고 죄 밖에 모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무엇으로 자유 하느냐? to freedom, 과 무엇으로부터 자유 하느냐? 의 from freedom 으로 구분됩니다. 여기서 무엇으로부터는 죄책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두려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율법주의,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자기중심적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그렇다면 무엇으로 자유 합니까? 이것이 자유가 필요한 목적입니다. 자유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 현대인들의 큰 숙제입니다. 우리는 의로, 거룩함으로, 참된 지식으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자유 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유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의와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마치 좋은 것을 안 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속임수를 통해 인간은 속고 맙니다. 사탄은 자유를 상급으로 걸고 하나님처럼 되고 눈이 밝아지고 죽지 않는다고 했지만 결과는 사망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인 사망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면 손해보는 것 같고, 교회에 나가는 시간이 속박당하는 생각이 들며, 예수를 믿으면 담력도 없고 약한자다.고분고분하고 괄시의 대상이 된다. 거칠어야 힘이 있고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대우받는 세상이다. 이것은 모두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한 자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건에 대한 사탄의 계략)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사탄이 파우스트를 찾아와 거래를 하죠! “영혼을 팔면 당신의 하인이 되겠다고” 사탄은 항상 이렀습니다. 우리를 속일 수 있다면 자존심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의 권세로 우리를 옮기셨다고 선언합니다. 롬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현상이 본질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현상에 우선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2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본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처럼 신앙생활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난 사랑했는데 넌 왜 안해? 이러면 벌써 사랑이 아니듯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교회 봉사의 헌신된 마음가운데도 사탄은 이것으로 시기와 분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이스라엘의 오해는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남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한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의 오해는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제, 옳은 것을 했다는 것이 기준과 척도가 됩니다. 이런 자기증명의 신앙은 공동체를 메마르게 합니다.
우리 청년들의 공통적인 문제인 술문제를 조심스럽지만 다루고자 합니다. 술 먹는 것이 죄냐? 묻는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죄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술은 통제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금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술 안마시는 사람이 마시는 사람을 정죄한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정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난 새벽기도 나오는데 저 사람은 안 나온다. 난 큐티 하는데 넌 큐티 안 하네! 난 제자훈련 받았는데 넌 훈련도 안 받네! 이러면 결국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도 서슴치 않고 칼을 들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술을 먹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사님! 전 술 먹어도 안 취하게 먹습니다. 그럼 왜 먹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안에서 발견된 우리의 삶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잘못하고 덤벼들면 같이 죽습니다. 자기 실력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배우자 문제로 기도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믿음의 배우자면 정말 좋지만 저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신앙만을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봐야 합니다. 우선 사람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으면 정말 좋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 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으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으면 정말 힘듭니다. 그럼에도 배우자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정말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권면 드립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이는 물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수영 실력과 같아서 잘못하면 같이 빠져 죽습니다. 반드시 더욱 스스로를 훈련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에 전념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같이 정죄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기 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죄는,사탄의 공격은 무섭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인생속에 어떻게 하나님께 항복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성경말씀에 신자들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시고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결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열등감과 자존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죄란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은 하나님조차 자신 앞에 무릎을 꿇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증명하려고 봉사를 하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죄에 있어서우리에게는 에수님 밖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선택이 있다고 생각하면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 아래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불편해 합니다.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래 들어가 항복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당하게 행하면서도 죄를 짓고 옳은 일을 하면서도 죄를 지으며 생명을 손에 지고도 사람을 주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요한복음 21장 베드로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의 열정과 기질을 죽이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의 부르심과 소명은 실패를 향한 부르심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은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거듭말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성도입니다.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죄책과 두려움과 율법주의와 자기중심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의와 거룩함과 참된 지식과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향하여 가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함께 거할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 보배로운 진리를 빼앗기지 않고 날마다 주안에서 기쁨으로 발견되어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이제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