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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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뜻 깊은 성탄 기념 주일에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은혜가 성도님들 각 가정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며칠 전에 저를 방문한 어떤 미국 목사님께 여쭤보았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명절이 제일 큰 명절인가요?” ‘크리스마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와 New Year 가 1주일 사이에 있기 때문에 연휴가 길어서 큰 명절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그 목사님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크리스마스는 그 날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라는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날짜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서방교회는 12월 25일을, 동방 교회는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오늘날 성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얘기, 성탄절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슬픈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탄 기념 주일을 지키지만,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출생보다 그의 죽음이나 부활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 것 같습니까?
신약에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곳은 두 곳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아예 생략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의 의미를 부여할 뿐, 그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 외의 신약성경 그 어느 곳에도 예수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아주 적게 얘기하고, 출생보다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처음부터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실 때부터 이미 죽음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벌써 시므온이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의 예언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첫아들이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에 정결 예식을 행하러 갔는데, 시므온이 아기를 보자마자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눅2:29-32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이 찬송을 하고 나서,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눅2:34-35,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에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여기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무엇이겠는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 할 사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이 어미 앞에서 고통을 겪으며 죽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기로 출생할 때부터 이미 십자가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생과 십자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탄생보다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찬 기념 주일에 성만찬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은 출생 전에도 창조 이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출생이나 생일에 비교적 덜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롬8:34에서,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 이전에도 계셨고, 십자가 죽음 후에는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아무리 위대한 말을 하고 업적을 남겼어도 다 죽어 무덤에 있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창조 이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오늘 본문 – 요한 복음의 서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였던 요한이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사람으로서 깨달은 놀라운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한 마디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성육신을 incarnation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시면서도 완전한 인간이신 분, 한 인격체 안에 두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령의 조명으로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육체를 갖고 태어나시게 되었을까요? 왜 인간이 되셔야 했을까요?
첫째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보내실 이유도, 그리고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5:8)
둘째로,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비유인데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을 중간에서 연합시키고 인도하려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쪽만 알아서는 부족합니다. 만약에 미국에 한국 대사를 보낸다면 누가 적합할까요? “영어를 잘하는 분, 또는 한국말을 잘하는 분, 아니면 영어와 한국말을 둘 다 잘하는 분?”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죠? 미국에 있는 한국계 기업체에서 직원을 뽑을 때, 누구를 선호할까요? 영어만 하는 사람이나 한국말만 하는 사람보다 바이링궐(bilingual man or woman)을 선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 당할 운명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구원자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셔서, 유일하신 인간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도 증거하고 있고,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둘 중 하나를 부인하면 이단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강조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성보다는 신성을 더 강조해야 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하면서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선재성입니다. 즉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절에서는 예수님을 창조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증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독자들에겐 세례 요한의 증거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으로 당대에 유대인들에게터 가장 신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요한이 그에 대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세례 요한은 다른 곳에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보다 먼저 계시신 분, 즉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4절, “그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들에게 영원한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 권세를 이시기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인데, 어찌 빛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빛 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살다 보니 빛이 비추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밤에 어둠 속에 잠을 자는데 누가 불을 키면 짜증이 나는 것처럼, 죄인들은 빛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어리석게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본문 요1:9-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어둠 가운데 사는 백성들 중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음을 열고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1:12절은 모든 성경 구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결혼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신부가 신랑을 맞아들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인도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선 교제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해서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얻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부족함을, 무력함을 느낍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부족한 것을 구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자녀가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듯이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네게 어떤 분이냐?”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어떤 분인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죄로부터, 사탄의 권세로부터,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왕이십니다. 나는 그의 종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질문이요, 생명과 직결된 질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식 때에 읽어주는 구절입니다.
로마서 10:9-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주로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 Lord는 로마시대 황제의 칭호였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던 황제의 칭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린다는 것은, “이제부터 제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주님을 위한 것이요,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제 생의 목표로 삼고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 그리고 충만입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여기서 사도 요한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율법도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 속에서도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겐 용서의 선언을 통해, 병자들에겐 치유의 손길을 통해 한 없는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아니 진리 자체(the Truth)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제자들을 가르쳐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도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왕이냐?”라는 질문을 했을 때에, 대답하시길,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다시 질문을 하였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이 그 질문에 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답했을까요? 대답을 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예수님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빌라도는 지금 진리 앞에 있었고, 진리를 만났고,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빌라도가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가 무엇이냐? 은혜가 무엇이?’ 묻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믿어야 하고, 받아 들여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성탄 주일에 다시 한번 예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부관계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위해 우리 주 예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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