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8:4-21 착하고 좋은 마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Notes
Transcript
눅8:4-21 착하고 좋은 마음
씨는 하나님의 말씀(4-15절)
4절부터 15절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씨 뿌리는 비유’(마13:18)입니다. 이 비유는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비유이며, 누가복음에서는 간략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도시와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모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씨가 무엇인지를 11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러므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이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곳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길 가와 같은 사람, 바위 위와 같은 사람, 가시떨기 속과 같은 사람, 그리고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을 좀 한다고 하는 사람은 예배 시간 이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고 듣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풍요로운 것 같지만 하나님 말씀의 기갈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듣더라도, 마음이 좋은 땅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의 기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하나님 말씀의 기갈이 오는 사람들의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길 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길 가에 있다는 의미를 12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공중의 새가 하나님 말씀의 씨를 빼앗아가는 경우입니다. 공중의 새는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길 가와 같은 사람은 마귀의 방해로 하나님 말씀의 씨가 마음에 뿌려지지만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 원인을 마귀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마귀의 방해는 인류 역사 가운데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마귀는 심지어 주님까지도 시험을 했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깨트리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그렇게 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마귀가 이런 방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손길이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마귀가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이 길 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를 공중의 새인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내 마음에 울타리를 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마음이 바위 위와 같은 사람입니다.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바위 위에 씨가 떨어져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의 의미를 13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마음이 바위 위와 같은 사람은 마음이 길 가와 같은 사람과 비교해서 좀 나은 듯해 보입니다. 우선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받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바위 위와 같다면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습기가 없어 말라버립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것은 잠깐 믿음 생활을 하다가 시련을 당할 때 그 믿음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음 생활을 할 때에는 이런저런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자기희생과 섬김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된 생활을 시작해 보면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전적인 말을 듣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변화된 삶의 방식을 유지하느냐 포기하느냐를 두고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시련입니다.
그 시련을 견디지 못해 믿음 생활을 떠나는 사람을 가리켜 13절에 주님께서 ‘배반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배반하는 자이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분을 배반하지 않도록 시련을 잘 이겨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마음이 가시떨기 속과 같은 사람입니다.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씨가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면 씨가 싹이 나더라도 가시떨기가 씨의 기운을 막기에 식물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의 의미를 14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음이 가시떨기 속과 같은 사람은 마음이 길 가와 같은 사람과 비교해서 좀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바위 위와 같은 사람처럼 하나님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 가시떨기가 되어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하루 동안 염려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로 얼마나 염려가 되십니까? 염려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가시떨기를 빨리 제거하십시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재물에 대한 ‘마음씀’이나 ‘두뇌 활동’이 하나님 말씀 묵상보다 더 활발하다면 그 가시떨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향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위해 먹고 마시고 입고 관리하는 것이 너무 강렬하고 집요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 한다면 그 가시떨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갈이 오는 사람들과는 달리 말씀의 흡족한 비를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입니다.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좋은 땅은 씨가 뿌리를 잘 내리고, 공중의 새로부터 빼앗기지 않고, 습기도 충분하고, 씨가 발아하여 성장하는데 기운을 막는 것이 없는 땅입니다. 좋은 땅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15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은 마음이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번역된 원어 ‘카르디아’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3요소가 선한 것에 맞춰져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으로서 구원에 감격하여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를 공중의 새가 와서 빼앗아가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입니다. 믿음 생활이 시련에 넘어지지 않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가시떨기를 제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캄보디아서 말씀을 전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 또 전해달라고 함. 태도가 다름. 영어로 전했고 준비 없이 다윗이야기를 전했을때. 설교자 만큼 듣는자의 태도가 중요함을 깨달음. 요즘 말씀을 못들어서 가 아니라 전심으로 듣고자하는 좋은 마음이 보기 힘듬.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비유의 뜻을 여쭈었습니다. 말씀의 뜻을 알고자 할 때에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함이 아닌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호기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 해석을 하시기 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 허락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 비밀이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며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문자 그대로 비밀이 됩니다.
10절에 ‘다른 사람’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당시 복음을 거부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나 율법의 조예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와 여러 여인들처럼 귀신이 들렸고 병들어서 고독하게 살았던 사람들, 소외 계층의 사람들,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우리 마음 밭에 씨로 뿌려질 때마다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그리고 믿음의 시련이 닥쳐와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 믿음의 성장의 기운을 막지 않도록 말씀을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하루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십시다.
등불은 등경 위에(16-18절)
오늘 본문은 등경 위에 두어야 하는 등불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족들에 대해서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6-18절은 ‘등불 비유’, 즉 등불을 켜서 등경(등잔걸이) 위에 두는 이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후에 ‘등불 비유’를 하셨습니다.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 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전등을 켤 수는 없다 할지라도, 불을 켤 수 있는 라이터나 성냥이 없는 지역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불이 아주 귀했습니다. 그리고 라이터나 성냥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불을 꺼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줄여 놓고서, 나갔다가 들어와서는 불을 밝게 해서 등경 위에 두고 생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불을 어떻게 켜는지’나 또 ‘그 불을 어떻게 간수하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비유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산상수훈에서는 소금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는 것이 곧,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등불을 켜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은, 또한 이 세상은 ‘어둡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어두움의 일이 정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한 사람을 지배하고 나면 얼마나 추해질 수 있고, 얼마나 타락할 수 있으며,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신문, 방송, 인터넷을 통해서 매일 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켜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은, 또한 이 세상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라는 것입니다. 달빛도 비치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길이나 산길을 헤드라이트가 고장이 난 자동차를 운전하여 가는 것 상상이 되십니까? 가로등이 모두 꺼진 고속도로에서 헤드라이트가 없이 질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세상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운전하면서도 자기 헤드라이트가 고장이 난 줄도 모르고 달리고 있습니다. 자기 헤드라이트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니까 잘 작동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두운 곳이고, 그곳에 그리스도인만이 등불을 켜서 빛을 비출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표정하게 있다가 갑자기 재채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채기하려는 사람의 표정만 바라봐도 재미있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사흘에 한 번씩 감던 머리를 하루에 두 번씩 감습니다. 또 여자는 화장하는데 더 공을 들이기 시작하고, 옷장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할지라도, 빛이 있으면 그 주위는 밝게 되어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빛은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말씀을 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말씀의 빛이 그 사람을 통해서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동일한 말씀을 알다고, 말씀을듣는다고 해서 동일한 결실을 맺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동일한 양의 빛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18절 하반절은 달란트 비유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 생각에는 주인이 열 달란트 있는 사람에게, “네가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한 달란트만 주면 좋겠다.”라고 말해서, 세 종이 각각 9달란트, 4달란트, 2달란트를 가지게 되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오히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이미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29)
오늘 본문과 동일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그 아는 것을 기초로 해서 더욱 깊은 학문의 길로 가게 되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는 학생은 공부를 더욱 등한히 하게 되므로 결국은 이전에 조금 알았던 마저 모르게 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우리의 신앙이 진실해지고 진지해집니다. 말씀을 존중할수록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19-21절)
19-21절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줍니다.
(19-20)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때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바알 세 불(Beelzebul) 논쟁’, 즉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을 때라고 증거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동생들은 친척들의 말이 사실인지,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전히 인간적인 염려에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가족은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찾아온 가족들에게는 약간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고, 혹시 예수님께서 가족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에서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고, 그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동생 유다는 ‘유다서’까지 기록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들을 외면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가족,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가족이 되기 위해서도 말씀을 바르게 듣고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지 않거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예수님 가족 공동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