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음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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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2)

지난 주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첫 번째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아신다. 즉 이러한 아심은 우리처럼 듣고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셨다는 의미에서 아는 것입니다. 1장은 예수님을 ‘말씀’이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의 영화로움’ 간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세우시는 기도… 유한한 인간은 자기의 뜻을 세우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갖고 삽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고사성어 ‘입신양명’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죠. 이는 유교의 최초의 경전 효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즉 효도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몸을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도를 세워 행한 후 후세에 이름을 떨친다 할때 입신행도 양명어후세라고 하고 이를 합쳐 ‘입신양명’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도를 행한다는 것은 세상을 좋게 한다는 의미나 우리나라 조선조부터 출세를 의미하는 말로 변질된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이 있는데 ‘부득지 독행기도’라는 말입니다. 뜻을 세우고 길을 가지만 결과적으로 혼자라 해도 길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군자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길을 따르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옳다고 믿는다면 자신이 세운 뜻을 따라 가면 길 즉 도에 이른다는 의미즘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반대로 사람의 길을 실날하게 비판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생각하며 뜻을 세우고 출세 한 것을 ‘악인의 길’이라고 선언하고 심하게 ‘짐승과 같은 삶’이라고 선언합니다.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악인’, ‘짐승’과 같은 거친 표현 때문이죠. (잠 삼십장)
예를 들어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나 독립 운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들에게 악인의 길, 짐승과 같은 삶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오만과 독선에 사로 잡혔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들은 나라를 위해 뜻을 세우고 행하므로 고귀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친구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행위를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악인과 짐승과 같은 삶이란 먼저는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간이 처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은 1편부터 의인과 악인을 대조적으로 비교하고 있고 우리가 매주 읽는 잠언은 지혜가 있고 없음을 지혜롭다. 어리석다로 비교하며 신자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태양 빛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빛 아래에 사람들은 옳고 그름의 방향을 알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옳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싶어하고 그러한 빛 아래에서 무엇이 선하며 악한지를 깨닫는 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마치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죠. 성경도 악인이라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준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아주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에 그러니까 성경에서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전쟁이 능한 사람들이서 주변의 나라를 정복하고 빼앗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 머리를 잘라서 옆구리에 차고 자랑하던 매우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요나라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멸망하시겠다는 메시지를 전하자 태도를 바꿔 회개했는데 자신들이 기르는 동물까지도 회개에 참여시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받으시고 진멸하고자 했던 심판을 거두셨습니다. 그때 요나는 자기 나라 즉 앗수르에 의해 침략 당했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기가 막혔고 그가 외친 회개하는 것도 매우 소극적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 어쩔수 없이 전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너희는 절대 회개하지 말고 멸망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말도 안된다는 불평도 서슴없이 내뺕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듯 자기 입장이라는 사이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중심적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같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잔혹성 즉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상대를 죽이는 것이고 두 번째로 생각이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함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나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바라봄이 없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나 잘난 맛에 살아 가고, 물불 안가리고 이익만을 좇아 사는’ 의미가 ‘짐승과 같은 삶’이라는 것이며 그런 삶의 멸망은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은 불과 며칠전 사람들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선동 문구에 취하지 않고 자신의 때를 따라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삶으로 그분의 죽음이 인류의 죄악을 구원할 영원한 하나님의 성취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은 충분히 ‘잘난 맛’으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 내셨고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기도는 ‘무엇을 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다른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빠르게 호칭처럼 부르고 넘어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에 너무나 빠르게 달려가지 않습니까? 하물며 여러분이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뭔가를 부탁할 때 한참을 생각하고 이럴 땐 이렇게 대답하고 저럴 땐 저렇게 대답해야지 하며 고민하고 뜸을 들이다 ‘아버지’하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라고 가르치신대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16장에서 제자들을 향해 ‘자녀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주신다’ 즉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이유인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의 간구를 들어 주는 것은 자녀로 하여금 다시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께로 돌려드릴 ‘그것 때문’입니다. 은행에서 대출서류에 적격하기 때문에 대출이 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주시는 것은 다시 자녀의 기쁨에 거하시는 아버지의 존재하심,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행하신 일들이 다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게’하는 것으로 드려지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흠향하다. 즉 향을 태울 때 소금을 쳐 언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려드리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흠향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자신이 어떻게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는가하는 것을 기도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6절가지 나오는 것이죠. 즉 2-6절은 우리가 앞서 오랜 시간동안을 살핀 요한복음의 요약이자 정의된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렇듯 우리의 지난 삶의 시간을 담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앞으로의 일을 구하며 채우길 원하고, 바라는 간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를 부르며 영화를 돌리는 내용으로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가? 적은 무리가 앉아 있는 이곳이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예배하는 곳으로 인정되는가? 남편 때문에, 아빠 때문에 어쩔 수없이 온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며 함께 하는 자리가 맞는가? 맞다면 그것을 기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자리에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배반한 가룟 유다 그리고 배반할 베드로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알게 된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우리에겐 이미 2천년전 지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여전히 ‘알게 되는’ 즉 믿음이라는 경계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예수의 기도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구경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주 뜨거운 불을 보는 경험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또한 안다라고 말하지 말고 불 곁으로 다가와 뜨거움을 경험할 때야 비로소 깨닫고 알게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6절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는 대상입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7절에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우리에게 이르렀고 여전히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깨닫고 분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판단하는 기준은 언제나 ‘나를 위한’ 이익을 따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결국 시편 49:6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가도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청년을 소개합니다. 그를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19–20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런 것을 잘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년의 마음을 잡고 있는 기준이 ‘자기의 재물과 자기의 힘’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만족함이 없는 삶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좀 싫어하는 그리스도인들 무리가 있는데 겉으로 온갖 찬양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서서는 사람에 대한 인, 의를 모른체 하고 사는 부류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로 ‘만족’함을 적어도 경험하고 산다는 점입니다. 비록 그것이 사람에 대한 인. 의가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곳에서 은혜라고 말하고 경험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깊은 만족’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찬양을 크게 틀고 눈물 흘리며 무엇에 취한 듯 해야 할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불러주신 하나님의 자녀로 사람에 대한 인. 의를 지키며 그럼에도 옳은 것을 나타내고자 올바른 길을 따라 이러저러하게 살아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불러 주신 자녀의 이름을 이제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런 기도가 주님께서 간구하신 바입니다. 9절에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만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빠진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힘없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비밀에 쌓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기쁨이라기 보다는 지켜야 할 의미에 가깝고 설교는 감격보다는 배워야하는 공부처럼 힘들기만 한 것입니다. 다시 16장을 읽어보면 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구하라 그리하면 받는다. 그렇게 받으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이자 예수께서 아버지의 기쁨이 충만한 간구를 기도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7장 13절에서도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은 이렇게 아버지와 하나됨을 통해서 입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가 그것을 경험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고 살아낸 삶을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드러내어 아버지의 영광을 돌려 드릴 때 마치 향에 뿌린 소금처럼 태워 드릴 때 아버지의 기쁨이 저와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됨은 지금 우리가 가족이라는 하나됨 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21절에 ‘아버지여 아버지게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복’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을 구하다. 복을 받다. 즉 한자로 ‘복 복’을 사용하는 복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엎드리다는 의미의 엎드릴 복’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야 말로 이어서 ‘세상으로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복’의 상태가 되면 드러나게 되고 드러나게 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이는 아버지의 것 즉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을 보전하기 위함이요 보전을 위해서 하나가 되는 것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 됨’입니다. 가족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이익이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하는 건 가족이라는 하나 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잘됨은 부모의 잘됨이고 자녀의 고통은 부모의 고통입니다. 또한 부모의 잘됨은 자녀의 잘됨이고 반면 부모는 고통을 숨겨 자녀로 하여금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습니까? 이런 원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아는 것입니다. 부모가 세상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전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는 의미를 이해할 때 육신의 부모가 그러할진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자녀다움으로 즉 거룩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진리’로 자녀다움을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처럼 찬양에 취해 눈물을 흘리지 못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사람에 대해 옳음을 노력하고 스스로를 바르게 하려고 애쓰고 계신다면 그리고 약한 자를 돕고자 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러했다고 확신하시면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확신은 ‘하나 됨’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하나 됨’을 익숙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됨은 하나 됨이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한 상태이다. 자유한 상태는 기쁨이 충만한 상태이다는 말이나 표현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19절까지 제자들을 위한 간구였다면 20절부터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여기에 우리는 여기에 속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 역시 ‘하나 됨’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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