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4. 금요기도회. 헛물을 켜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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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스겔 23:22–30 NKRV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행음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서론

반갑습니다, 사랑하는 오산교회 성도 여러분. 지난 여름 무더위 속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 어느새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평안하셨기를 바랍니다.
주로 청년들과 함께하는 제가 이렇게 온 교회 식구들과 한 자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음에 참 감사합니다. 또한 부족한 사람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하시니, 이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입니다. 늘 이 강단에서 목사님들의 깊이 있는 말씀을 듣다가, 오늘은 조금 다른 '맛'을 보시게 될 것 같아요. 마치 매일 집밥을 먹다가 가끔 외식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 외식할 때 어떠신가요? 조용히 식사만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음식이 나올 때마다 감탄도 하고, 사진도 찍고, 누가 이 맛집을 골랐냐며 서로 칭찬도 하시지 않나요?
부족하고 연약한 종이지만, 오늘 이 시간 저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마음으로 귀 기울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성도님들의 집중과 반응 하나하나가 설교자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 오산교회 성도님들은 그만큼 품이 넓고 깊으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은혜를 준비하셨을지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서로 이렇게 인사를 나눕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엽시다.
최근 한국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이슈를 아시나요? 얼마 전 한국의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단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사안들을 논의하던 중, 하나의 특별한 제안이 공통적으로 나왔습니다. 바로 10월 27일 광화문에서 연합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의 배경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이 제정되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통합, 합동, 고신, 합신, 대신, 감리, 침례 등 주요 교단들이 뜻을 모아 이 연합예배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 위기를 막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저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편으로는 걱정과 염려가 밀려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런 대응이 옳은 것일까?"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성애는 성경이 분명하게 금하는 죄입니다. 또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논리적으로 맞지 않거나 악용될 소지가 있는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이 법의 제정이 성경의 진리와 충돌하는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고, 심각한 도덕적 타락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법 막고 나라 지키자, 교회가 거룩한 방파제가 되자"라는 구호를 들을 때마다 제 가슴도 뜨거워집니다. 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생명처럼 여기는 하나님의 사람 중 하나인데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더는 가슴이 뜨거워질 때 냉철한 머리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훈련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던 중, 한가지 놀라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이 문제의 배후에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주신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은 참으로 슬픈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전해야 했던 메시지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의 기대와 희망을 무너뜨리는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들과,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는 예루살렘을 결코 이방인들에게 넘기지 않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이러한 기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해야 했습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외쳐야 했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메시지가 에스겔서 1장부터 24장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에스겔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에스겔이 하루 이틀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언을 시작한 때는 주전 593년경이었고,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은 주전 587년경이었습니다. 약 6~7년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도통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은 에스겔의 외침이 자신과는 무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꿰뚫기 위해,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마치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가 이야기를 들려준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울리는 강력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문학과 예술이 지닌 마음의 문을 여는 힘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강력한 비유들이 바로 에스겔서 16장과 23장에 담겨 있습니다. 이 장들은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사랑이 절절하게 녹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시간 관계상 전체를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요약만으로는 이 이야기들의 깊이를 다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주말 동안 시간을 내어 에스겔서 16장과 23장을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어느 황폐한 변방의 땅에 한 갓난아기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피투성이에 제대로 씻기지도 않은 채 땅에 버려진 아기는 살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사냥을 나온 위대한 왕국의 왕이 아기를 발견했다.
"불쌍한 것." 왕은 황금 망토로 아기를 감쌌다. "내가 너의 아비가 되리니 부디 포기하지 말고 살거라."
왕은 아기를 데려가 최선을 다해 보살폈습니다. 아기는 자라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되었고, 왕은 그녀를 자신의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값진 보석과 의복을 선물했고, 온 왕국이 그녀를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곧 그 사랑을 배신하였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남자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거리의 창녀보다 더 심하게 자신의 몸을 팔아넘겼고, 심지어 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녀는 왕이 준 금은보화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이웃 나라의 멋진 남자들을 사신으로 초청해 향락을 즐겼고, 그들의 더러운 관습을 따랐다. 동쪽과 서쪽의 모든 나라와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왕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온 왕국에 울려 퍼졌다. "내가 너를 길가에서 주워 이토록 높였건만, 네 행실이 창녀보다 못하구나."
이 이야기는 유대인의 역사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유대인들은 북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인해 앗수르의 노예가 된 것을 목격하고도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북이스라엘보다 더 심각한 음행을 저지릅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은인의 등에 칼을 꽂는 이런 행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이런 배은망덕한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연애 중이시거나 결혼한 성도님들께 여쭙겠습니다. 만약 내 연인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번 - 당장 헤어지고 모든 연을 끊는다. 2번 - 용서해주고 내 연인의 못난 모습을 감수하고 산다. 어렵죠?
자녀가 있는 성도님들께 여쭙겠습니다. 만약 내 자녀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번 - 당장 내쫓아버리고 호적에서 파버린다. 2번 - 용서해주고 내 자녀의 못난 모습을 감수하고 산다. 분명 1번도 2번도 아닐겁니다.
왜 선택이 어려울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듯 쉽게 관계를 정리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괜찮은듯 다 받아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으로도 이렇게 고민이 되거든, 하물며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복잡하고 깊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제 3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실 수 없는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와 자신의 행동의 책임을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이 계속해서 외쳤던 임박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랑하시기에 내리시는 징계였고,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라고 대시는 매였습니다.
22절을 읽어봅시다.
에스겔 23:22 NKRV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본격적으로 말씀을 주해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만 짚고 갑시다. 첫째, 이 이야기 속에서 오홀리바는 남유다를 가리키고, 북이스라엘은 오홀라로 불립니다. 둘째,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어색한 번역이 하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새번역에서는 “네가 정을 뗀 네 정부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네가 그동안 갈아탄 남정네들”이라고 할 수 있고, 남유다의 마음이 그토록 음란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 다시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 가슴 아픈 결단을 내리십니다. 그동안 남유다를 보호하셨던 손을 거두시고,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사랑했던 자들의 손에 넘겨주시기로 합니다. "네 소원대로 해주마. 한 번 네가 음행하던 자들과 함께 살아보거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바벨론, 갈대아, 앗수르에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간 남유다의 눈에 그토록 멋져 보이던 꽃미남들, 권력가들, 재력가들, 소위 '잘나간다' 하는 이들이 모두 모여 남유다를 에워쌉니다. 그리고 그들의 방식대로 남유다를 대하기 시작합니다.
에스겔서 23장 25-26절은 이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남유다가 그토록 흠모하고 동경하고 사랑했던 자들이 남유다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는 학대와 폭력, 수치와 절망뿐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빼앗고, 죽이고, 망하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남유다는 그동안 이들을 흠모하고 동경하고 사랑해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나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이런 끔찍한 일들만 겪게 될 것이었는데, 남유다는 오히려 그들을 막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많은 것들을 감내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신부인 남유다의 아름다움이 벗겨지고 수치를 겪게 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는 신부와 함께 수치와 조롱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시려고 마음먹으셨습니다.
남유다가 스스로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27절을 통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에스겔 23:27 NKRV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다시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들에 눈도 돌리지 못하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에스겔서에서의 이 대목에서 “아 그렇구나” 하고 끄덕이고 넘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이 생각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되,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세상을 동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의도는 언제나 같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수치와 조롱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오히려 사용하셔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선한 것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과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심지어 악한 의도를 가진 세력들조차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통해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집중을 잃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남유다에게 심판이 임한 이유는 세상이 악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심판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신부인 남유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남유다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세상이라는 것을, 온통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끌어다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 부분을 보게 하셨습니다. 동일한 원리로 한국교회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이 임한다면 그 이유 또한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부인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신부인 교회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세상이라는 것을 끌어다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한 주간 묵상하며 점차 이 이야기가 이 민족의 이야기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게 느껴졌던 말씀이 비로소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민족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민족이 어디 있었습니까? 일제에 유린당해 핏덩이가 되어 버려진 이 민족,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건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손수 그 손으로 이 민족을 감싸 안으시고 이 민족을 보살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먹고 자라나 독립과 광복을 이뤘고, 전쟁의 참상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눈부신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며 경제대국, 문화강국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큼이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열방의 눈에 아름답고 영화로운 나라가 되었는데, 이것이 어디 우리 스스로 이룬 일들이었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야 이걸 알 수 없으니 기적이라는 말로 쉽게 넘어가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극진하신 돌보심과 키우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알고보면 남유다와 별 다를게 없지 않습니까?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은인의 등에 칼을 꽂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교회가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부가 아니라 세상을 흠모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음탕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의 신부된 교회 안에 우상을 숭배하는 음란함이 가득합니다. 돈과 섹스와 권력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아니라구요? 이 시간 우리의에게 오셔서 외치고 계신 성령님의 엄중한 질문에 한 번 답해보십시오.
우리는 어디서 기쁨을 누립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오락과 쾌락으로 우리의 기쁨을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평안을 느낍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재물로 평안을 보장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고 자랑합니까? 입술로는 하나님 닮은 섬김과 희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남들이 우러러보고 떠받들어줘야 그제서야 만족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랑하려 합니다.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온통 휘젓고 세상을 흠모하게 만든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해외여행을 위해서는 휴가와 돈을 척척 잘 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간과 돈이 부족합니다.
루이비통, 구찌, 샤넬 등 명품 소비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1인당 명품에 쓰는 금액이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꼭 명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을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는 데에는 빚을 내서라도 돈을 쓰는데,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에는 조금의 금액조차 무리하게 느껴집니다.
부동산 투기, 주식 투자, 비트코인 등, 내 재산 불리는 데에는 학창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열과 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서는 눈이 벌개지도록 밤을 새도 힘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룩을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밤이 늦는 꼴을 볼 수 없습니다.
최고급 식당, 최고급 세단, 최고급 주거문화, 뭐든지 최고급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마음이 미친듯이 거기에 끌립니다. 내 삶에 그게 없어서 기쁘지 않고, 그게 없어서 평안하지 못하고, 그게 없어서 자랑할게 없다고, 그래서 죽을 것 같다고 외치며 하나님 손을 뿌리치려 안간힘을 씁니다. 나와 짝하여 음행하자고 유혹하는 세상의 모든 유행에 우리는 마음이 내키는대로 짝을 바꾸어가며 간음을 저질러 왔습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값없이 베풀어주신 것들로 우리는 그동안 이런 일을 열심히 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우상숭배자가 아니면 누가 우상숭배자입니까? 우리야말로 창기들이고 도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아니구나 내가 다시 보니 너희들은 창기보다 더한 자들이구나. 이런 우리가 무슨 거룩한 방파제가 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남유다를 향해 그렇게 하셨듯 우리 또한 스스로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많은 것들을 감내하시기로 다시 한 번 결단하십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이 벗겨지고 수치를 겪게 되더라도, 우리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굳게 마음 먹으십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는 신부와 함께 수치와 조롱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시려고 마음먹으십니다.
“좋다. 너희가 그토록 짝하길 바라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직접 겪어보게 해주마. 세상은 온통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수치와 조롱하려고 너희를 꾀고 있었음을 깨닫거라. 그리고 진심을 다해 나에게로 돌이키거라.”
이것이 교회가 앞둔 거대한 위기 앞에서 읽어내야 할 하나님의 뜻과 마음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분명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시기를 겪게 될 것입니다. 통과되어서는 안될 악법이고, 통과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면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사용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라면요?
우리는 마치 이것이 통과되면 이제 교회는 망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결사항전을 벌이려고 하지만, 아닙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창기가 되고, 신실한 종이 도적이 되기에 교회에 큰 어려움과 고통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교회에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음행하기 때문에 심판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에스겔 23:30 NKRV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결론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하나님 앞에 자복하여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광화문에 모여 악법을 막자고 소리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헛물을 켜는 일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마치 이런 일과 같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안해온 학생들에게 매를 때리려고 합니다. 근데 반 학생들이 우루루 나서서 “회초리는 나쁜 것입니다! 회초리라는 무시무시하고 추악한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소서!” 외치는겁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선생님 속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회초리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따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왜 매를 맞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구요.
거룩한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는 허울 가득한 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거룩한 방파제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음행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돌이켜서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어련히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가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살 길은 동성애 타도, 악법 철폐를 외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살 길은 자복과 회개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그 손을 들어 차별금지법 통과를 막아주시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용서하여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맞아주시는데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도적같고 창녀같은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맞아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경우에라도 변함이 없을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돌이킨다면 다시 정결해지고, 다시 아름다워지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받는 신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그에 비해 세상은 얼마나 부질없고 형편없는지 우리가 절절히 깨닫기까지 하나님은 가슴 아픈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음행에 대해 놀래 자빠지며 진실한 마음으로 돌이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변명치 말라. 하나님을 덜 사랑한게 아니라. 세상도 사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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