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애 버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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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강대상에 올라가 무릎 꿇고 기도한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셔서 주님의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하길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분이 되게 하옵소서. 다른 것을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오직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완전한 예배 되게 하옵소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내 삶이 하나님께 맞춰지는 예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하신 후에 황지수 집사님 대표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히브리 말로 가바다) 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8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8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합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신성모독은 우리의 법대로 하면 죽을 법이다. 라고 합니다. 레위기 24:16 에 보면요. 이렇게 나옵니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사람이라 하여도 절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율법에 신성모독을 하면 유대인들은 돌로 쳐죽이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법으로 하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감히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메시아로 여겼던 수많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였다간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유대지도자들을 향해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 총독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로마의 법대로 처형하면 유대지도자들에게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의 죄 즉,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명분으로 고발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많은 신화와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러한 신적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갑자기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기서 등장하는 두려워하다의 원어는 ‘φοβέω’인데요. 이 단어는 성스러움에 대한 경외를 말합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서 신의 아들로서의 경외심을 잠시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묻습니다.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밖에 있는 유대인들의 그 말을 듣고 어떤 성스러움을 느껴서 다시 관저 안에 계신 예수님께로 가서 묻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묻습니다.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죠. ‘정말로 신의 아들이냐?’라고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십니다. 빌라도가 기대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이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아시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을 변호하거나 살기 위한 말을 하시지 않으시는 이유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53:7 말씀입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죄를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야 하기에 침묵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묻습니다.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고 말합니다. 죽일권한도 있고, 살릴 권한도 있습니다. 이 권한에 대해 듣고 예수께서는 그 권한이 의미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더 큰 분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의 권한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고, 나의 생명도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에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빌라도가 자신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죽이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빌라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갑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닌 더 큰 뜻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러니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라기 보다 나를 너에게 넘긴 유대인들에게 더 큰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죽음으로 넘기는 인간의 죄를 말합니다. 판결을 한 빌라도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우리 모든 인간의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죄를 선택하는 인간의 죄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빌라도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봐야 합니다. 나의 죄로 인해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이 아닌 빌라도 때문도 아니고, 유대인 때문도 아니고 내 죄 때문에 예수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아셨고, 자신도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그냥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소리 지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렇게 외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겁을 먹습니다.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날까 두려웠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직고권이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을 고발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로마 황제는 13명의 총독을 두어서 각 나라를 관할하게 했습니다. 커다란 제국이기 때문에 각 나라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총독이 필요했는데 그 총독을 관리하는 일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직고권을 만들었습니다. 속주민들이 총독을 고발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총독이 잘못을 하거나 로마 법을 어기거나, 황제에게 반역할 조짐이 보이면 속주민들은 로마 황제에게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발하면 총독은 징계를 받거나 다른 경쟁 상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 황제는 속주민들을 통해 각 나라 총독들을 견제했습니다. 빌라도는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황제에게 고발될까봐,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는 말처럼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자를 처형하지 않으면 로마 황제를 반역하는 일이 될까봐 염려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려고 하니 총독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결정을 하려고 재판석으로 갑니다. 가바다라고 하는 돌을 포장해서 만든 높은 자리입니다.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입니다. 위엄이 있는 높은 자리입니다. 재판할 때 앉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아래에 있고 빌라도는 돌로 멋지게 만들어 놓은 재판석에 앉아서 고민합니다.
정오가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너희의 왕인데 내가 어찌할까 묻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왕이니 너희가 결정해라는 의미겠죠. 유대인들은 또 소리지릅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소리지릅니다. ‘없이 하소서’라는 말은 ‘없애 버리소서’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αἴρω’입니다. 종결하고, 끝내고, 꺼내며 심지어 죽이거나 살인하다. 치워버려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없애다, 들어올리다, 지고 가다, 제거하다, 치워버리다, 죽이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take away 입니다. take him away 그를 없애라, 제거해라, 치워라, 죽여라의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없애 버리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제거해야 할 대상, 치워야 할 대상,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에게만 쓰이지 않았고,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에게도 쓰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스데반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향해 ‘αἴρω’ ‘세상에서 없애버리자’고 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방식은 자신들에게 불편한 존재는 없애 버리는 방식을 택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랬고, 스데반에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요한복음이 처음 시작될 때 세례요한의 입으로도 표현됩니다.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서도 세상 죄를 ‘지고가다’할 때 단어가 αἴρω’ 입니다.그러니 예수께서는 이미 처음 등장하실 때부터 이 일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을 통해서 선언된 ‘세상 죄를 ‘아이로’ 즉, 지고 가시는 어린양, 세상 죄를 없애 버리시는 예수님, 세상 죄를 치워버리시는 예수님, 세상 죄를 죽이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죄로 여기고 없애 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거되어야 할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시고 스스로 죄가 되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이 되십니다. 자신이 죄가 되셔서 세상 죄로서 들러올려지심을 받으십니다. 자신이 죄가 되셔서 세상 죄로서 치워지십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5 에서도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제거하시고, 치워버리시고, 죽이시려고 자신이 죄가 되셔서 없어지시고, 제거되시고, 치워지시고, 죽이심을 당합니다. 유대인들이 외칩니다. ‘스타우로손, 스타우로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물음에 대답합니다.
대제사장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하나님만을 높여야 하는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거룩한 다리와도 같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입으로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발언으로 볼 수도 있고요, 그들의 가식적인 아부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발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대제사장들은 자신의 권력과 종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가이사를 왕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마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했던 상황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만을 모시며 살아왔는데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서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사무엘은 당황했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저들이 나를 버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대제사장의 발언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닌 가이사를 왕으로 모시는 그들의 본심과 하나님이 필요 없고 세상 권세가 필요하다는 외침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왕으로서 필요 없습니다. 오직 가이사만이 그들의 왕이 되면 됩니다. 가이사가 왕이 되어야 자신들의 힘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종교화되고, 율법화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묵상해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조금은 없애고 싶은 존재는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목표나 이익이 더 중요할 지 모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예수님이면 필요하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면 별로 필요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없애고 싶어하고, 제거하고 싶어하고, 내 삶에서 치우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릅니다. 내 이익을 채워주시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도움이 되는 예수님, 내가 세상에서 잘 되도록,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잘 되도록, 저 집사님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잘되게 하시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용하는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αἴρω’ 해야 합니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없애야 하고, 제거해야 하고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건 예수님이 아닌 우리의 소원이자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거해야될 대상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내 욕심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들과 함께 제거되시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욕심과 함께 제거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가져가야 합니다. αἴρω’ 의 또 다른 의미는 취하다, 가져오다의 뜻이 있습니다. take의 의미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airo하고 또한 예수님을 ‘airo’해야 합니다. 세상적 욕심을 ‘take away’하고 주님의 나라를 내 마음에 ‘take’해야 합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넘겨주는 자가 아닌 예수님을 얻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얻는다는 것은 잠시 좋은 자극적인 것을 얻는 것이 아닌, 참 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우리를 좋게 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복의 상태로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힘든 이유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다른 것들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다른 것들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을 얻지 못해서 우리는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욕심들을 채우려고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를 깨닫고 그 안에서 복의 상태로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진리이시고, 복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take하고 모셔들이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어쩌면 우리는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내 안에 있어야 우리는 복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