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선지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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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교자로서 어떤 때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 설교를 듣고 꼭 실천해서 성경이 말하는 그 복을 꼭 받았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이 간절할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우리 성도님들이 꼭 실천하셔서 성경이 약속하는 이 하나님의 복을 꼭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32살때인 2006년1월에 캐나다에 입국했습니다. 토론토를 거쳐 위니펙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저는 위니펙이 어디에 있는지 , 어떤 도시인지 전혀 모른채 왔습니다. 위니펙뿐만 아니라 캐나다 자체도 잘 모르고 왔습니다. 계획하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005년 3월에 목사안수 받고 4월에 결혼을 하고 6월에 교회 개척을 하려고 부목사의 사역을 사임하고 개척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녹록치 않아 고전하고 있었는데 7월에 일산에 있는 친척목사님이 저를 좀 보자고 전화를 하셔서 아내와 함께 그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30살에 개척하기엔 너무 젊다. 일단은 40살까지는 좀 배우고 개척을 하는게 좋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권면하신것인 유학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천받은 곳이 위니펙의 한 한인교회였고 그 교회 목사님이 추천하신 곳이 프로비던스 신학교였습니다. 급하게 학교 서류를 접수하고 학교로 부터 편지를 받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2006년 1월에 캐나다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딱히 뭘 알아보고 할 틈이 없었습니다. 처음 위니펙 공항에 도착했을때 담임목사님과 전도사님, 그리고 신학교 관계자가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학교 직원의 벤을 타고 학교로 이동하는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위니펙에서 한시간 거리에 신학교가 있는데, 가는 도중에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밤 11시에 도착하여 이동을 하니 정말 온통 하얀 눈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시간을 달리니 , 순간 두려움이 확 몰려왔습니다. 내가 속아서 지금 인신매매 당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캐나다는 이런것이 아니었는데 계속 차를 타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기만 하니 괜히 두려웠던 것입니다. 한시간을 달리니 겨우 불빛 몇개가 보였고 타운 하우스 형태로 몇집이 붙어 있는 건물에 저를 내려주어 가보니 문에 웰컴 성광황 수현신 써진 환영문구를 보고 그제서야 제대로 왔음을 알고 안도했었습니다.
낯선 땅 낯선 곳으로 이주를 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괜히 주눅이 들고 움추려 들게 됩니다.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그러한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헤브론에서 20년을 살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슨이유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헤브론에서의 20년의 삶을 정리하고 블레셋땅인 그랄땅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창 19장을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자기 마을에 찾아온 세명의 나그네들을 집단 성폭행하겠다고 마을 청년들이 당당하게 롯의 집을 두드리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당시에 나그네들중에서 미모의 여인들이 있을 경우 강제로 잡혀가고 남자가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그저 막역한 기우만은 아니었던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되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낮선 이방의 땅에서 서로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혹시라도 그와같은 상황이 생기면 자신들을 부부가 아닌 남매 지간으로 행세를 하기로 서로간에 약조를 하였습니다.
(보여만 주세요)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사라가 어찌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아브라함의 제안을 사라가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의 무법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발단이 되어 결국 아브라함의 자신의 아내 사라를 그 지역의 왕인 아비멜렉의 후궁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아내분들이 읽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고 남편들이 읽기에도 참 민망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더 참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대로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사라를 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부터 24년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때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무사히 사라를 돌려받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아브라함은 여러차례 하나님의 약속과 나타나심을 경험했었습니다 .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4년이 지난 상황에서 전혀 달라진거 없는 것처럼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두려움의 힘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면 평소에 할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미터 정도는 누구나 뛰어넘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절벽과 절벽에서의 1미터는 선뜻 뛰어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같은 1미터인데 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합니까? 두려움때문입니다. 떨어질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때 우리가 능히 감당할수 있는 상황에서도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주눅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랄이라는 지역의 이름이 참 재미있습니다 .
그랄 - 정지하다. 멈추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멈춰버린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불이났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이에게 이렇게 묻드랍니다.
아야 119 전화번호가 뭐냐 119 전화번호가 뭐냐고? 그런데 아들역시 그 질문을 듣고 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119전화번호가 뭐지 뭐였더라..
불이 나 당황하니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것이 포커스가 아닙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전혀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라를 후궁으로 데려간 아비멜렉을 호통치시며 혼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참 이상하지요? 잘못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했는데, 왜 야단은 아비멜렉이 당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때에 아주 중요한 축복하나를 해주십니다.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갈바를 알지 못하게 한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아브라함이 그 막연한 여정을 능히 감당할수 있게 하는 특별한 약속이자 축복을 하나 해주셨습니다.
그게 3절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합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니가 축복하는 사람을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할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히 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만약 누군가가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저주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갈바를 알지 못한채 그 험한 나그네 인생을 시작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 약속이었고 보장이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이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면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가 될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후궁으로 데려간 그 날밤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경고하십니다.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비멜렉아 니가 데려간 그 여인으로 말미암아 너는 죽게 될것이다.
아비멜렉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항변을 하지요 하나님 왜 아무 죄없는 저를 죽이시겠다는 것입니까?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사라를 범하기 전에 하나님이 지금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경고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그날밤에 범했더라면 아비멜렉이 비록 아무런 악한 동기가 없다 할지라도 아비멜렉은 죽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본문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그는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십니다.
선지자라는 말의 뜻은 נָבִיא 나비 - 히브리어로 나비인데 이 예언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1. 예언(豫言) 미리 예,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함.
영어로 prodict입니다
2. 예언(預言) 맡길 예. 우리가 은행에 예금하다고 하지요 그 예자입니다. 그러나 맡길 예자의 예언은 말씀을 맡은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prophecy 입니다.
본문 7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Chapter 20
7 Now return the man’s wife, for he is a prophet, and he will pray for you and you will live. But if you do not return her, you may be sure that you and all who belong to you will die.”
prophecy 하는 사람 곧 prophet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나비라는 히브리어는 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선지자 나비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자라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바로 그 선지자 , 하나님의 약속을 맡은 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였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아브라함을 저주할뻔 한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사라를 범하게 되어 사라가 더렵혀지게 되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깨지게 됩니다. 그것이 아비메렉이 아브라함을 저주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은 그 아비멜렉을 저주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 하나님이 애초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겠다라는 약속이셨고 축복이셨고 그 축복그대로 아비멜렉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끝을 보십시오 어떻게 끝이 납니까?
아비멜렉이 화들짝 놀라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고 돌려줄뿐만 아니라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여기 어디든 니가 살고 싶은데 장막을 치고 살아라고 안전을 보장해줍니다.
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그리고 사라에게는 은 천개를 주어 사라가 당할뻔한 수치에 대한 보상을 해줍니다. 다시말하면 아비멜렉이 철저히 아브라함을 축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하나님은 그 약속그대로 아비멜렉을 축복하십니다.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축복해서 아비멜렉의 집안의 태가 열린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아비멜렉의 임한 저주를 풀어주시고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풀려지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믿음도 강하지 못해서 또다시 말도 안되는 실수를 했던 사람입니다. 보통 남자도 하지 않는 그런 바보같은 일을 두번이나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내 선지자라 부르시고 그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똑같은 원리로 아브라함의 그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아브라함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자 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슬프나 괴로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의지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자로 선지자로 산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들을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놀라운 복이 우리안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가장 잘 아는 사람중에 하나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아무리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기를 쓰고 좆아다녀도 그를 죽이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유는 단하나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은 두번이나 사울을 직접 죽이고 왕이 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를 저주하는일을 죽기보다 더 꺼려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를 향한 자신의 저주가 자신에게로 돌아올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아말렉 청년이 사울을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으로 다윗에게 보고를 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상을 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사울을 죽인것처럼 거짓말로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죽은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아멜렉 청년을 그자리에서 죽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6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괴로워합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자신을 15년동안아니 죽일려고 좆아다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어야 자신이 왕이 될수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것은 자신이 스스로 원했던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어도 얼마든지 이해가 되고 누구하나 왜 그랬냐고 말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해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했다고 말한 아멜렉 청년을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니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저주했으니 그 저주가 너에게로 똑같이 돌아가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와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못난 찌질이입니까? 아비멜렉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아비멜렉이 모르고 서라도 아브라함을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저주하시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얼마나 못된 왕이었습니까? 막판에는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들을 행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끝까지 사울을 저주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끝까지 그를 축복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그대로 사울을 축복하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축복의 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자자 곧 말씀을 맡은자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 맘에 그렇게 안드는 교회도 성도도 ,역시 나와같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허물을 보고 우리를 저주하면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실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저주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실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만일 그 수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입술을 지켜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더욱 큰 복을 내리실것입니다.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심지어는 안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축복해라. 만약에 그 축복이 그 집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 복이 축복한 너에게로 돌아올것이다.
여러분 반대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애매한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저주한다면 만약에 그 저주가 그 집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저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조국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하루에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다가 쫄딱 망해버린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성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루에 세번씩 어김없이 예루살렘을 축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바벨론의 총리로 삼아 버리셨습니다. 요셉만 총리가 된게 아닙니다. 다니엘도 총리였습니다 아니 다니엘은 3대 왕에 걸쳐서 총리가 됩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이 쏟아주시는 복을 다 경험하지 못하고 쏟아버린채 살아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두에 설교하면서 오늘 설교만큼은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꼭 듣고 실천하면 좋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이 다 선지자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렇습니다. 아니 우리교회뿐만 아니라 위니펙에 있는 모든 교회 성도님들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맡은 선지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입술이 그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우리의 입술을 판단과 저주가 아닌 축복과 칭찬의 나팔로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복과 은혜로 채워가실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