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2 views
Notes
Transcript

예수님과의 만남

여러분을 최근에 놀라게 하며 감동을 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 적이 있으십니까?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일을 조용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감동하시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직접 대면한 적도 없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큰 믿음 때문에 자기가 구하던 것에 대해 응답받게 됩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있던 한 백부장입니다.
1. 백부장의 성품
1) 자기 종을 사랑한 사람
1세기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로마 백부장은 60명에서 80명 정도의 군인을 지휘했습니다. 백부장들은 로마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고, 군인들을 훈련하는 일을 맡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한 백부장이 거기 있는데, 이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이 종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이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종들, 즉 노예들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나 동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이 죽더라도 그것은 말 한 마리가 죽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아끼던 말이 죽으면 손해가 되고 마음도 조금 슬프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종이 죽으면 손해이고 슬프겠지만 그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지금 죽어가는 자기의 종을 단지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종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손해를 보기 싫으니까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 종이 살아나기를 원했습니다.
2)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은 사람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에게 있어서 놀라운 점이 또 있습니다. 그가 로마를 대적하던 현지인인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1세기 당시 유대인 장로들은 로마 사람들을 미워했는데, 특히 자기들을 직접적으로 압제하며 폭력을 사용하는 로마 군인들을 아주 증오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시대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증오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영화에 나오는 로마 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부드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하게 식민지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현지인으로서 로마의 압제를 받는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이 백부장을 예수님 앞에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백부장의 월급이 다른 군인들보다 훨씬 높았지만, 그가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아주 큰 희생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건물이나 집을 지어주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할 의무가 전혀 없고, 그 돈으로 얼마든지 자기를 위해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유대인들의 호감과 존경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땅에는 로마 군인들이 많았고 그중 백부장들도 많았으며, 천부장들도 있고 더 높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독 이 사람만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이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서 자기 대신 자기 종을 치유해 주시도록 부탁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유대인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자기들을 압제하는 로마 제국 백부장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만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백부장이 부탁해서 왔지만, 사실은 억지로 오거나 벌 줄까 봐 무서워서 온 게 아니라 자기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 백부장의 말이라면 우리가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자기들이 자원해서 예수님께 그를 위해 종을 치유해달라고 요청하러 왔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위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와 그 사람 사이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진실한 사랑과 친절은 가장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음도 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불편하고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가 있을 때, 그것은 이처럼 진실한 사랑과 친절로 서로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됩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에 있으십니까? 우리가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에 있을 때 이렇게 같은 교회라든지, 학교라든지, 회사라든지항상 자주 봐야 하는 그런 사람인데 굉장히 불편하다면 먼저 다가가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아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사랑으로 다가가 친철을 베푼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 기도하고 나갈 때 놀랍게도 관계가 풀리는 것을 봅니다. 기도하고 나갈 때 놀랍게도 내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3) 겸손하여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높이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그가 직접 나가서 예수님께 구하지 않고 대신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것은 그가 거만하거나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예수님처럼 위대한 분 앞에 나올 만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장로들의 부탁으로 자기 집을 향해 거의 다 오셨을 즈음에, 또다시 사람들을 보내는데, 이번엔 친구들을 보내서 말을 전합니다.
집 근처까지 오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말도록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음이 나빠서 문전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예수님 같은 분을 맞이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가 로마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자기 집에 부정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부정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음식에 있어서는 유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부정한 것들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먹지 못하는 것들과 신상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괜히 예수님께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예수님께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기 집에 거의 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둘러보다가, 유대인들의 율법이 생각나서 거기 걸리는 것들이 많은 것을 보고 급히 친구들을 보내 유대인에게 부정한 이방인인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않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급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철저히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 로마 백부장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 수만 있다면 우리 인간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결코 그런 원리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기 전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마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너 살고 나 살자.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면 너 살고 나 죽자.”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실 동안 철저히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분의 본을 따라 우리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 2:3-5, 새번역)
진정한 능력과 권위는 물리적인 힘이나 사회적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은, 진정한 권위는 희생과 겸손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아들이 사춘기를 지나고 십대가 되면서 키가 커지면 엄마보다 더 많이 커집니다. 힘도 더 세집니다. 그런데 왜 엄마에게 순종합니까? 엄마는 자기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태어나게 해준 그 자체가 벌써 희생입니다. 그래서 아빠 말은 좀 안 듣는데, 엄마 말은 그래도 듣습니다. 또 엄마를 더 케어합니다.
진정한 리더십도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겸손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만일 강도가 여기 총을 가지고 들어와 위협하며 꼼짝 말라고 할 때, 우리는 모두 강도가 든 총 때문에 무서워서 그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우리 리더이며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렇게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이 결코 낭만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주 어려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참한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면 아주 불리하고, 손해 볼 수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조롱받고 핀잔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부활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살게 될 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게 될 것이고 감동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변화시킨 예수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기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희생하는 사람의 말에 파워가 있습니다. 자기 것을 챙긴다고 착착 움직이는 것이 약은 것 같고 똑똑한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압니다, 저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그런데 오히려 묵묵히 다른 사람을 챙기고 희생하는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입니다.
2. 백부장의 믿음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위대한 것은, 그가 물리적인 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겸손했다는 점입니다. 자기의 권력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그것도 식민지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대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가난한 일개 유대 나라 선생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말이 됩니까? 역사적으로도 로마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나타낸 경우가 드문 사람들입니다. 특히 자신들의 식민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보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겸손보다 더욱 위대한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예수님도 깜짝 놀라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9절)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내가 깜놀했다.’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너무 깜짝 놀랐어.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을 수 있냐? 이스라엘 중에서도 못 봤는데, 이방인인 이 로마 사람이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 하며 깜짝 놀라셨습니다. 어떻게 이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백부장의 믿음은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아픔과 고난을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는 평안히 살고 싶다. 아무 고통도 없이 살고 싶다.’라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까?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픔과 고난을 통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백부장은 죽어가는 자기 종을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종이 아픈 것이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종이 아파서 힘들어하며 죽어 가는데 그것을 보는 것 자체가 정말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아끼는 물건이 깨지고 없어지거나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면 얼마나 마음이 안 좋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아픔과 고통 때문에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지방을 정찰하던 자기 부하들에게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에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으로서 그는 자족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부장입니다. 수하에 최소 60명 이상의 부하들을 거느린 백부장입니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권력도 있었고 돈도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유대인들도 섬기면서 존경도 받고, 상당히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아파서 죽어 가는 자기 종을 고치실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다가 믿게 된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가, 아니 오히려 대적하다가 믿게 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분들 중 상당수가 그 변화의 원인이 고통과 어려움이었다는 겁니다. 고난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고 녹아내릴 때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험은 자존심 상하거나 창피하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히려 복입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의 체험을 하고 나서 말씀의 씨가 뿌려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나오는 ‘네 가지 토양의 비유’ 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뿐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는 본래 있던 모습 그대로 있는 땅이지만, 좋은 땅은 일구어진 땅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좋은 땅이란 갈아지고 흙이 뒤집어 엎어진 땅입니다. 삽, 곡괭이, 호미, 쟁기 등으로 막 깨고 부수고 갈아엎는 과정을 거친 땅이란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거기서 불필요한 것들은 다 제거되고 결국 옥토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은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겪은 땅이 아니겠습니까? 고난을 겪기를 원하지 않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뿐이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땅만이 열매 맺는 좋은 땅이 됩니다.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저절로 좋은 땅은 없습니다. 다 갈아엎은 땅들입니다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서는 좋은 땅이 될 수 없습니다. 파헤치고 찔리고 갈아엎는 아픔을 겪고 나서야 옥토가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첫 세 땅, 즉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는 습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옥토에는 습기가 있어서 결실합니다.
우리도 습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뭡니까?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뿌려야 열매가 맺힙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이 결코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거친 후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이 백부장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위의 법칙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7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7b-8절)
군대 장교로서 그는 명령의 권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관이 자기에게 명령하면 그대로 해야 하고, 자기도 부하에게 지시하면 그대로 움직이듯이, 예수님도 명령만 하시면 예수님 권위 아래 있는 질병이 물러갈 것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오실 필요도 없고, 직접 보실 필요도 없고, 그저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동시에 아주 굳건하고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도 놀라시게 만든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나온 믿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10절)
오늘 예배에 참석하고 계신 여러분은 각자 다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오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삶 속에서 아픔과 고난을 겪으면 당연히 힘들지만, 그것은 “우리 삶에 가치 있는 손님이며 선생님”이라는 좋은 말을 이전에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가치 있다’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가르쳐주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손님’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이라 함은, 수준이 올라갈 때마다 다른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가서 졸업하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로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또 대학으로 갑니다. 이렇게 다음 단계 학교로 올라감에 있어서 이전 학교 선생님들이 같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두고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순간으로부터 필요한 교훈을 얻으면 그 교훈이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두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겁니다.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나서 더 높은 수준의 것을 배우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고난과 아픔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사실 정말 불행한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고통스럽거나 고난당하는 것? 그게 아닙니다. 풍요로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소위 잘산다고 하는 부자 나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풍요롭고 자연도 얼마나 잘해놓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자살률입니다. 그렇게 부자 나라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풍요롭다고 곧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생의 고통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고난도 허락하셔서 우리를 빚으시고 더욱 주님을 향해 나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시며, 우리가 당신께 마음을 열고 당신을 전심으로 찾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완벽한 믿음을 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온 것입니다. 믿음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흐르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즉, 내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머무는 게 아닙니다. 머물면 썩습니다. 내 안에만 있으면 썩어 버립니다. 그래서 은혜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한 일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밖으로 흘려 내보냈습니다. 그럴 때 그의 믿음을 통해 그의 종이 치유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 나의 믿음을 통해 나 자신이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하고, 그것이 흘러나가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은혜의 강물에 흠뻑 젖게 하는, 그런 놀라운 삶을 우리 모두가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