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7:1-9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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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7장 1-9절
사람들은 기도를 인간의 열심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방을 하면, 가정이나 사업장에 이러한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
이 말씀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 그리고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글을 씁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업이 잘 될 때나, 안 될 때, 심지어 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면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ᄒᆞ님의 능력을 으지하는 기도가 만나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의 오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특별히 우리가 평안 중에 있을 때, 쉽게 찾아옵니다. 어려운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보답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지극히 선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불붙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그의 나라가 모든 원수들로부터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던 때를 말합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하신때에”
다윗은 감사와 감격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했던 다윗에게 감사한 마음과 함께 한가지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안과 호사에 비해서 여호와의 궤가 받고 있는 대접이 너무 보잘 것 없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자신은 복을 누리며, 펴안하고 좋은 집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궤가 아직도 너덜너덜한 천막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2절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다윗은 송구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궤를 모셔다 놓을 집을 세우겠다는 좋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자신이 거하고 있는 백향목 궁보다 더 멋있는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지자 나단에게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선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도 정말 훌륭한 생각이라고 박수쳤을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 역시 다윗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라고 격려합니다.
3절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의 동기는 선했고, 선지자 역시 이를 승인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입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에게 임합니다.
4-5절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하나님께서 감격스러워 반문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겠습니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리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6절에 집과 장막, 성막이 등장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에 다녔다는 말씀은 “나는 사람의 손으로 건축한 그 집에 머문 적도 없고, 그럴 이유나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 장막과 성막에 다녔다는 것은 백성 중에 운행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에게 어느 지파 누구에도 왜 너희들은 집이 있으면서 내 집은 안 지어 주냐고 따지고 물은 적이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7장의 흐름 속에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나머지 그 앞에 들어가 앉았다가 자기 마음속에 솟구치는 감사를 어찌 표현할까 하는 의욕을 가지고 집을 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기도가 거절되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너는 내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거절입니까? 아니면 응답입니까? 분명 응답입니다. 이것으로 다윗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할 일 아니라면서 다윗의 의도를 꺾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순진한 다윗의 의도를 넘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십니다. 다윗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슬그머니 보여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8-1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하나님은 다윗의 의욕을 꺾고 누구의 집을 짓겠다 하십니까? 다른 아닌 다윗을 위해 집을 지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정확하게 장차 온 인류를 구원할 언약의 그림을 서서히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짓겠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이런 계획을 열어 주실 줄 전혀 몰랐습니다. 12절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그의 나라는 다윗의 왕국입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네 몸에서 날 씨”는 가깝게는 솔로몬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다는 것은 솔로몬에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 역시 범죄하여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획은 솔로몬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은 “여디다야”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한 음성이 들립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무슨 말씀입니까? 영원히 견고한 왕위를 받으신 분은 솔로몬이 아닌, 또 다른 ‘사랑하는 아들’ 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다윗의 씨로 세우시고자 했던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진정한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영원한 왕위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성전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아버지께 온전한 순종을 하셨지만, 그 백성을 대신하셔서 채찍을 맞으시고 징계를 당하셨습니다. 이보다 분명한 예연과 그 성취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 실체로 오셔서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오셧습니다. 다윗의 왕조를 보면 하나같이 형편없습니다. 모두가 무너졌습니다. 실수 투성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한번도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진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죄악을 뚫어 내시고 끝까지 역사 속의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십니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완성될 것임을 뜻합니다. 그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재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은 낳고”
여기서 중요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다말입니다. 그가 어떻게 베레스를 낳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대로 시아버지와의 있을 수 없는 관계를 통해 이 생명을 낳았습니다. 그 사건을 함축하는 족보가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라합은 이방 여인이고 기생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누구와 결혼합니까? 죽은 남편의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온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다윗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다윗 왕의 족보고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 뒤에 히르는 사건들은 인간이 토해낸 역사의 얼룩들을 비춰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역사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신 열심을 쉬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자격이 없을 지라도 하나님은 이루어가십니다. 그 약속을 다윗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약속입니다. 나를 향하여 절대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기 수준을 근거로 좌절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좌절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다윗은 기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앉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생각보다 더 큰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다윗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이 좌절되는 것에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내 헌신이 무시된다고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기에, 반드시 그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인간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는 변함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의 뜻이 꺽이고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는 그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