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질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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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7-15
서론
최근 제가 결혼을 준비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결혼 시장’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장 준비부터 시작하여 ‘스.드.메.’라고 하는, 이전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 때는 상상도 못했던 과정을 거쳐 혼수, 예물 등 다양한 것들을 접해보고 준비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 ‘결혼 시장’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랑님, 신부님. 너무 아름답고 멋있으세요.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완전 주인공이시네요.” 라는 칭찬과 함께 본론을 말씀하시죠. “신부님이 너무 이쁘시니까, 이걸 하면 더 빛나보이실 거에요. 신랑님이 이걸 추가하면, 훨씬 더 기품 있어 보이실 거에요. 아름답고 멋있는 두 분에게 어울리는, 두 분의 품격이나 아름다움에 맞는 것은 이 정도는 되어야죠” 와 같은 말로 저희들의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결혼시장에서 자주 들었던 말, “아름다운 당신에게, 품격있는 당신에게 맞는 것! 어울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라는 어찌보면 허울만 좋은 멘트들에 왜 저희의 마음이 혹하고 솔깃했던 것일까요? 그냥 칭찬 들으니까 좋아서? 아니면 뭔가 더 비싼 것, 좋은 것을 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아니요! 감사하게도 저와 제 아내 될 사람은 비싼 것, 좋은 것, 명품 이런 것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들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었던 것은 결혼식날 가장 아름다워야 하는, 아니!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품격에 맞게, 신부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데 있어 이런 것들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신부에 맞게, 멋있는 신랑에 맞게 어느 정도 갖춰져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게 어디 결혼시장 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가치, 이 세상의 순리, 이 세상의 통념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집에 있는 보물, 반지, 명품을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겠습니까? 가치 있는 것이니 소중히 다루고 귀히 다루기 위해 좋은 상자, 아름다운 상자에 보관해야지요. 보석에 걸맞는 상자에 넣어줘야지요! TV에서 자주 보이는 아파트, 화장품 광고의 문구는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당신을 위해, 가치 있는 당신을 위해 걸맞는 집이 바로 이 집입니다!” “아름다운 당신의 피부를 더욱 탄력있고 아름답게 해줄 화장품입니다.”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순리, 이 세상의 통념은 가치 있는 것, 소중하고 귀한 것은 그 귀한 것에 걸맞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그 가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가치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게, 비슷하게, 걸맞는 것을 덧붙여서 이 가치 있는 것이 더욱 가치 있게 만들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의 통념이요 가치요! 순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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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의 통념, 순리와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아니 완전히 모순되고 역설적인 말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 함께 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보배는 그것에 걸맞는 아름다운 상자, 그걸 돋보이게 하는 것에 넣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도대체 사도 바울은 이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럼 지금부터,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통해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두 가지 핵심 주제로 알아보도록 할텐데, 간절히 바라기는 성도님들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통념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순리. 그 역설과 반전의 진리를 깨닫고 돌아가는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합니다.
본론1
다시 한번 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러분,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배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 보배가 무엇인지 4장1절에서 6절에 걸쳐 말해주는데요. 다 읽지 않겠습니다. 두 단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의 광채’, 한 단어로 요약하여 말씀드릴까요? ‘복음’이 곧 ‘보배’다.
하나님의 성도된 여러분들에게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을 한번 드려보고자 합니다. ‘복음’이 뭔가요? ‘복음’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맞습니다. 예수님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반드시 더 말해야 하는 것을 담아 얘기해본다면, 복음은 이런 것인데요.
존 맥아더 목사님의 말에 따르면 “복음은 어떤 필요를 채워주는 게 아닙니다. 복음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 정의에 대한 것도 아니죠. 그런 것들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모두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 향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 회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믿음 등을 얘기하지 않으면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을 피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식인 복음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살 수 있는 소식!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는 이것이 보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보배가 어디에 담겨 있다고 합니까? 네! ‘질그릇’에 담겨 있다고 합니다.
‘질그릇’이 무엇입니까? 질그릇은 고대 근동 지역의 각 가정마다 구비된 평범한 물건으로 값이 나가지 않았고 잘 깨지던 그릇을 말합니다. 수리가 가능한 금속 그릇이나 녹여서 재활용이 가능한 재질로 된 유리 그릇과 달리, 질그릇은 한 번 깨지고 나면 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값이 저렴하고 본질적으로 귀하지가 않았던 그릇이 바로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그릇에 무엇을 담는다구요? 네! ‘보배’… 를 담는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상하지 않나요? 이토록 놀라운 보배인 복음이 초라하고 볼품없고 연약하며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담겨 있다니… 이것은 이 세상의 통념, 일반적인 생각으로 볼 때, 보배를 폄하하는 것이고 그 가치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보배,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보배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 보배를 어디에 담아야겠습니까? 다이아나 에메랄드 그릇이 아니라면, 최소 금그릇에는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배를 아름다워 보이게 하려면, 복음을 더 능력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구미가 당기게 만들려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잘 나가야 하고, 돈도 넉넉하고 큰 근심 걱정 없이 모든 일상이 평탄함 속에 살아가야, 사람들이 오!? 복음이 땡기네, 복음 갖고 싶네.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복음의 ‘비읍’자라도 관심을 갖지 않겠습니까?
본론2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첫 번째 진리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7절 뒷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첫 번째 진리의 내용은 ‘복음’은 어떠한 치장, 어떠한 꾸밈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우리가 잘되어야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된다고 해서 복음이 능력이 있고 특별해보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인 이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 있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영원 후까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이 계획은! 그 영광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가치로서 그릇이 아름답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첫 번째 진리를 우리 마음 속에 새기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내가 어떻게 되어서 복음을 더 아름다워보이게 하겠다! 더 가치있어 보이게 하겠다! 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탈피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경제적인 복을 주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쩜 이렇게 잘돼? 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복주셔서 잘됐지. 라고 할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게 하소서! 좋은 대학에 가야! 뭔가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을만한 것을 보여줘야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됐어? 라고 할 때, “하나님 잘 믿고 믿음 생활 잘 해나가니까 그렇게 됐어! 너도 믿어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 이런 간구를 하나님께 하곤 합니다. 보배를 아름다운 그릇에 담겠다는 그런 기도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기도가 아닌 이런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주께서 나를 향해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떠해지는 것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 되지 않게 하소서! 그 보배인 복음 자체를, 그 가치를 온전히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 복음의 보배되는 가치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복음의 보배됨을 제대로 알아 그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이러한 기도가 우리 삶 가운데 가득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합니다.
본론3
계속해서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것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진리 두 번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함께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절: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앞서 말씀드렸듯이, 질그릇은 굉장히 연약합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 값싸고 연약한 그릇이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그릇인 우리를 향해 여러 고난과 어려움, 환란과 핍박이 닥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그토록 자랑하는 ‘보배’가 너한테 있는데, 너는 왜 그 모양 그 꼴이냐고 비웃고, 비난하며 핍박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원인과 이유를 모른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며 박해를 받기도 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곤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심히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질그릇인 우리가 곳곳에 금이 가며 깨지곤 합니다. 이 낙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내뱉기도 하죠. “하나님! 금그릇, 은그릇이 되게 해달라고는 안할게요. 그래도 최소한, 보배를 가진 그릇인데, 깨지진 않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토록 아프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낙심되는 상황을 보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싸이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같은 말을 반복하냐? 그게 뭔 말이냐?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보배가 온전히 보일 수 있을까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다 보일까요?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면, 보배가 온전히 보일까요? 질그릇에 담긴 보배가 온전히 보이려면! 질그릇이 깨질 때, 질그릇이 보이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은 10절에서11절에 걸쳐 질그릇에 담긴 보배가 깨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다 함께 10절에서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철저히 없어지고 사라질 때 주님이 온전히 드러나십니다! 우리가 산산히 깨어지고 찢겨야 보배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가장 아름다운 질그릇은 철저하게 ‘깨진 질그릇’이 가장 아름다운 질그릇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이 말한 두 번째 진리의 내용을 우리 마음에 새기길 원합니다. 살다보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것 같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며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고 거꾸러뜨림을 당해 완전히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닥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 닥친 이 고난으로, 이 어려움으로 누구의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복음의 그 광채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감사할 수 있다. 더욱 힘을 얻어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결론
초대 교부 한 분을 말씀드리며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주후 1세기에서 2세기에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감독으로 시리아에서 복음의 역사를 많이 펼쳤습니다. 그의 노년기에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AD 98~117)가 동방의 도시들을 순회하던 중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황제는 이그나티우스의 명성에 끌려 그를 만났지만, 기독교를 멸시했던 황제는 혹독한 말로 이그나티우스를 빈정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사악한 마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입니다.”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리스도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답을 들은 황제는 적법한 절차도 없이 그를 로마로 압송해 콜로세움에 세웠습니다. 약 4만 5천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그를 맹수에게 던지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이그나티우스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 사이에 낀 하나님의 곡식으로 빻아져서 주님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고자 한다.” 그는 그렇게 맹수에 의해 몸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고 깨져 그 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순교의 피가 무의미한 피흘림이었을까요? 무의미한 깨짐, 찢김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들의 깨짐은 보배인, 복음을 드러냄으로 로마라는 제국을 변화시켰고 전 세계를 변화시켰으며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가장 힘이 있었을 때는, 평탄하고 돈이 많아 아름다운 건물과 예배를 드렸을 때, 가장 힘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가 가장 힘이 있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보배인 복음을 온전히 전했을 때는, 잘 나갈 때가 아니고 여러 박해와 핍박, 고난과 환란 중에 있을 때! 철저히 깨지고 깨져 온전히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였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으로서 이 땅에서의 삶 모든 시간에 걸쳐, 보배 자체를 드러내는 자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으로서! 우리가 깨지고 깨져 보배를 온전히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영광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질그릇으로서의 삶,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