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7 찬양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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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5:1–3 (NKRV)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첫번째 기도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모집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치 수학 공식을 외우고, 세계사의 사건을 기억하듯이 하나님을 암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지식에 있지 않고 삶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입에 있지 않고 손과 발에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위한 두번째 기도는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로 부르셨을 때에 우리를 향한 목적과 소망을 가지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오랜시간 하나님께서 기획하시고 계획하셔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소망은 우리가 신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의 소망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을 때의 그 목적과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고 소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사도바울의 세번째 기도입니다.
그 세번째 기도는 바로 이렇습니다.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기업을 간혹 어떤분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기업, 중소기업의 기업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유산, 상속, 재산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니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이야기 할 때 기업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시는 유업, 유산, 상속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1:5 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오돠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러니깐 성경은 일관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녀에게 하나님은 아버지로써 유산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에게 주시는 아버지 상속, 유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세번째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써 부모로써 그 자녀에게 주시는 그 상속, 유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업 유산을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유업의 특징을 몇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전서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 유업의 특징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또 더럽히지도 않고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하는 특징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그 영원한 기업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아버지로써 자녀인 우리에게 이미 유산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에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입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고 부족함이 없는 그 모든 복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써 자녀에게 주신 기업의 특징을 풍성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자녀에게 주신 그 유업의 특징은 풍성함입니다.
풍성함의 원어의 뜻은 가득찼다, 충만하다, 꽉찼다 입니다.
마치 우리가 큰 항아리에 물을 붓고 항아리의 아귀까지 찰랑찰랑 거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항아리 안에 조금의 공간도 없는 것처럼 물로 가득찬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업을 주실때 그 유업은 우리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는 어떤 공간의 여유도 없이 가득찬 풍성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업의 특징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족함 없는 부유함이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은혜가 하나님 안에 풍성하게 있음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특징은 어떻게 해서든 그 하나님안에 거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필요한 은혜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끝이 없고 풍성한 은혜와 선물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 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경험했고 그래서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인지는 모두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바울도 품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아마 사도바울도 알 것입니다. 자기 같은 사람은 품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죽이던 그 사람이 어떻게 용서가 되고 용납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품으시고 용납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얇지 않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경험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과 같은 사람이 품어질 정도의 은혜라면 그 은혜는 부족함이 없는 끝이 없는 풍성한 은혜임을 사도바울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풍성함 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들에서도 풍성하다는 단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에 에베소교회를 향한 3번째 기도 입니다.
“하나님 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유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구제물품 처럼 불상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또 기부처럼 남아돌아서 주신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서 유업을 남겨주듯 정말로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그 유업 유산 상속의 영광의 풍성함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그것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누리고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어디서 누리고 맛 볼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답이 우리가 읽은 18절 말씀에 있습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어디입니까? 바로 성도 안에서 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1장 1절부터 17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그 안에서”가 계속해서 이야기 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성도안에서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로써 주어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풍성한 영광의 기업을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도 안에서 입니다.
성도 안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성도와의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면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가 업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 하셔도 충분히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냥 예배만 참석하고 설교말씀 듣고, 찬양 부르고 돌아가셔도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기업의 영과의 풍성한 은혜를 알 수 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말씀 묵상을 해도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신 은혜는 그정도가 아닌것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상상 할 수 없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성도안에 두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안에 교제가 있을 때에 깊은 관계가 있을 때에 누리고 경험하고 맛 볼 수 있는 것이 사도바울의 3번째 기도제목 입니다.
절대로 혼자 생활 할 때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와 관계가 깨지면 절대로 이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혹시 오늘 예배에 나오신 분들 중에 성도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성도 안에 아내와 남편이 포함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리를 누리기 위해서 성도와의 관계가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합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영광의 풍성한 기업을 성도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5편을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 누가 주님안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의 성산에 살 수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우리의 소원이 바로 이것아닙니까?
일평생 주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는 삶, 일평생 주님안에 거하는 삶, 일평생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 바로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삶입니다.
그 삶을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 시편 15편을 잘 보셔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사람의 특징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5편 입니다.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러니깐 남을 허물하지 않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안에 거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안에 거하는 사람은 입으로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않고, 비방하지 않고,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평하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하나님께서는 성도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드리는 말씀이지만,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셔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개인이 묵상하고, 개인이 기도하고 예배만 참석 했다가 가셔도 그 안에서도 은혜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주신 은혜는 그정도가 아닌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아십니까?
무엇을 볼 때 저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를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건물이 크고 멋있으면 건강한 교회라고 말 할수 있습니까?
교인 수가 많이 모이면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헌금이 많이 모이면 건강한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교회는 성도간에 건강한 교제가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그중에 처음으로 전하는 말씀이 8복입니다. 말 그대로 8가지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 7번째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 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 만큼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계신 분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 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7번째 복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과 자신을 화평케 하는 것과 또, 이웃과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이웃간에 화평케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이웃간에 화평케 하기 위해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사람, 다른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기 위해 내 손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옛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는게 이기는거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는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남에게 먼저 손내밀고,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은 지는 것이고 연약한 사람이고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보일 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먼저 손내민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먼저 무릎 꿇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손내민 사람이 큰 사람이고 화평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와 화평케 하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불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잘 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환경에 있을 때 모두가 똑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습니다.
과정이 같다고 결과까지 같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욕하고 손가락질 할 때 누군가는 화평하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의 허물을 덥어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려주고 덥어주고 안아주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도바울의 3번째 기도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화평케 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모퉁이 돌이 하는 역할은 이면과 다른면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성도들과 이웃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 하나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누구를 사랑 하고 섬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이미 경험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그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기다려주고 덥어 줄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하나 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시면 내가 그 사람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