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3 고린도전서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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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서론
1:1-3
고린도전서를 이해하려면, 고린도 지역의 특징과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입니다. 항구 도시의 특성상 많은 돈이 고린도로 몰려들며 고린도 시민들은 부요해졌고, 그만큼 빈부격차도 심했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아주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어느정도 음란했냐면, 고린도 사람들을 지칭 할 때, “코린티안” 이라고 말하는데, 코린티안은 음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 사람들은 매우 음란하고 방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음란의 시작은 우상숭배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600미터 가량 되는 높은 언덕 위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우상 숭배를 하기 위해 신전을 찾았고, 그곳에 있는 천여명의 여사제들은 자신들과 교합함으로써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거짓 논리로 사람들을 속이며 음란한 짓들을 행했습니다.
게다가 제사가 없는 시간이면 여사제들은 도시 한복판으로 와서 돈 벌이를 행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행한 대표저긴 음란 행위는 고린도 지역을 중심으로 동성애가 성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렇게 타락한 도시 한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세워진 고린도교회는 우연히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 아래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러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덴에 머물던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게 됩니다. 사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을 간 이유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간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은 아덴에서 성도들을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이 가득한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이 감정은 분노로 변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기다리면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도시 한 복판에 세워진 우상 신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나요? 음란한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격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화가 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파로키노마이” 이 단어는 “어떤 일로 인해 심각한 감정적인 우려와 연관된 불쾌함이나 자극을 받은” 것을 정의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만이 느끼는 분노였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분노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느끼는 분노였습니다. 어떤 분노였습니까?
하나님이 온 세상을 지으시고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자신만의 우상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자신이 우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기가막힌 장면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거룩한 분노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바울이 느꼈던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세상의 현상을 보면서 당연한 것처럼 그냥 넘어갑니다.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아덴에서 바울이 느꼈던 분노가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 외 다른 것들을 섬기고, 하나님 외 다른 것들을 따라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행해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결국 바울은 성도들을 만나야 하는데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덴은 핍박이 없어서 긴 기간 동안 선교활동을 했으리라 기대되지만, 이상하게 바울은 서둘러 그 도시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떠밀려 간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습니다.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사도로 부름받았습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쓸 때 첫머리에 대부분 자신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오늘날 목사는 사도입니까? 아닙니까?”
목사는 사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일부 목사님들이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의 직분은 예수님 당시 끝난 직분입니다.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배웠거나, 예수님으로부터 임명되어야 합니다. 사도로 부름 받으려면 적어도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사도행전 9장에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후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던 중,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도입니다. 사도직은 신약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그의 사도권은 항상 시비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가장 심하게 불거졌던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권에 문제에 대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가 지금 자신의 사도권을 밝히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손상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악착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여하신 사도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 부릅니다.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클지아는 헬라도시 국가의 시민들의 회집체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시민들의 회집체에 편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회집체”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는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모임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들의 새로운 공동체, 즉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라는 칭호를 예배 드리는 모든 각 처소의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에도 적용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에도 적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이방인의 교회 안디옥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은 안디옥교회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티아노스 즉,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 하면 “예수쟁이”입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아주 명료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신조도, 행동 규범도, 의식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다” 기독교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값진 인생과 위대한 공동체를 이루는 비결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 즉 성도들이 되도록 불림 받은 자들이라 부릅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도록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자기와 교제를 갖도록 ‘부르신’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들’ 또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택’, ‘부름’, ‘성도들’ 이 말은 같은 동의어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에게만 적용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교회는 스스로가 이스라엘의 이상을 실현한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쓴 칭호들을 모두 자신들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우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고린도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대속과 화해의 제사를 드림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롬 3:24) 따라서 거룩해진, 또는 성화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들이 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자신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5-7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뒤, 게바와 아볼로가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 뒤 고린도교회는 각각 당파를 나눈 채 서로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분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필요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의 필요에 의해 교회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분열하고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고린도는 돈이 넘쳐나는 도시였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푼 꿈을 앉고 고린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린도교회는 성도들도 성공 지향적이고 물질을 쫓는 도시의 분위기에 휩쓸려 성공주의 복음, 효율적인 복음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세상의 분위에 교회가 놀아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는 결단이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2023년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는 한 해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