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음질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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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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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위의 일이 있은 후로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동역자인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방문의 목적은 자신이 달음질하는 것과 이전에 달음질한 것들이 헛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바울이 달음질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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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교회는 변화를 필요로 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그 변화가 시작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깨닫고 이방인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기존에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에서 새롭게 교회들이 개척되는 상황은 많은 혼란을 가지고 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법을 강조했다. 자칫 신앙의 모습이나 내용이 변질되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교회가 결코 유대인들이 걱정하는 교회가 아님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유력한 종교지도자들과 합의를 이루고 교회의 일치를 만들어냈다.
이방인들(새로운 교회 공동체)과 유대인(기존 교회 공동체)들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바울이 움직였다.
이방인들은 교회에 유입되는 새로운 인원들을 이야기한다.
불신자들이나 젊은 세대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다른 환경과 상황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아주 오랜 전통과 법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전통이나 관습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역을 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합의점을 찾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전통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신앙의 형태를 구축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 하나됨을 이루는 방법
2. 하나됨을 이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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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공동체 : 이 공동체는 문화적, 인종적, 개인의 배경 등을 모두 초월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될 수 있고, 같은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것 외에 어떤 부칙도 우리가 한 공동체로 구원을 받는데 필요하지 않다. 억지로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거나 직분을 받아야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꼭 우리 교회에 다녀야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복장이나 행위에 대한 규정이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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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예배를 사정 상 빠지게 되었을 때 상당히 난감하다. 그러나 죄책감이나 불편함 때문에 드리는 예배는 이후에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때 감사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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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공동체 : 예수 안에 자유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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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문화적인 자유이다. 무언가를 보지 말라,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 등의 규율로 우리를 억압할 수 없다. 내가 개척했을 때 처음 생각했던 문화목회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과 성도의 모습들을 일반화 시킨다면 우리는 모두 아주 일부의 문화 속에서 얽매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바울은 그런 의도로 성도들의 삶을 구분하려는 시도들을 다 부정하기 위해 디도도 억지로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것들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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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정서적 자유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저래. 저럴꺼면 교회를 다니지 말아야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내 안에도 내가 성도로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오는 죄책감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은 다 율법이 주는 죄책감이다.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그것에 눌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애초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맡겨진 몸이다.
순종하지 못함으로 인해 죄책감에 휩싸여 사는 삶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이만큼 순종하게 하신것에 감사하며 더 순종하기를 바라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삶이 온전한 복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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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소명을 인정하는 공동체 :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7절).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신앙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도 서로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루트가 전혀달랐다. 그런 것처럼 복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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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도들의 은사와 능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소명 또한 다양하다. 교회에서 물질로 봉사하는 사람이나 청소하며 봉사하는 사람은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관계가 성립되어야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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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공동체 :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10절)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교회의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녀들을 위해 부모라는 보호자를 보내주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라는 보호자를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모와 교회를 통해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시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것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도 많다. 그 사람들을 우리가 다 도울 수 없으니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선택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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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교회가 처음 개척할 때부터 천원짜리와 오천원짜리 현금을 구제헌금으로 구분하여 모았는데 세어보니 9만9천원이 있었다. 가끔 우리 교회같이 작은 개척교회에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올 때가 있기 때문에 나뒀다가 오시면 5천원정도 식사를 하시라고 드린다. 요즘 밥값이 기본 만원은 하는데 너무 적게드리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1~2만원씩 드려야지 했는데 사실 대부분 노숙자분들이 교회에서 돈을 받으면 한군데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러군데를 다니시며 돈을 모으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식사보다는 술을 사드신다. 그래서 한군데서 많이 줘버리면 바로 술을 드시러 가니까 운동도 하시고 시간도 보내실겸 3~5천원정도가 적당하다고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셔서 그후로는 5천원정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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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교회가 받는 교회보다는 주는 교회가 되는 것이 나의 기도제목인데 성경에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이 있다.(행20:35)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가 기회가 된다면 가난한 목사님들을 섬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잘 지내고 있지만 정말 힘들고 어렵게 생활하시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분분투하시는 목사님들이 주변에 많이 계시다. 그분들을 도와드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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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계속 돈을 주는 도움뿐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고 싶다.
(잠언 6:6-11)은 내가 25세에 도장을 시작할 때 달력에 써놓고 매일 보던 말씀이다.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원리가 작은 부자는 근면(勤勉)에서 오고, 큰 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 타고난 상황이나 환경에 의한 것이 있고, 제도적인 문제도 있지만 개인적인 습관이나 잘못 그리고 무지함도 가난하게 사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와 근면함을 통하여 극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회에 이런 루트나 교육을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결론
결론
결국에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자기가 세우고자하는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 설명하고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교회는 자기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한 분 하나님아버지의 자녀들임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에서 분리된 개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그리고 나는 왜 교회를 다니는가?
이런 질문은 단순한 듯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런 고민이 없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 성장주의에 빠지기 쉽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치료되고, 돈을 잘벌고, 하는 일들이 모두 잘된다.
교회는 사람이 많아지고 건물은 커지고 화려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로 생각하고 그것에 몰입하고 매몰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삶과 교회들이 더 많다.
그것을 보고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면 돌이킬 수가 없다. 이것이 첫단추가 잘못껴진 신앙의 질병이다.
우리는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삶의 의미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이 가치있는 삶인가?
이것이 분명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삶을 추구한다.
그것이 잘 되었을 때 우리는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람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