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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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민수기 29:1–11 (NKRV)
1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2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릴 것이며
3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에는 십분의 삼이요 숫양에는 십분의 이요 4 어린 양 일곱 마리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5 또 너희를 속죄하기 위하여 숫염소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되 6 그 달의 번제와 그 소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 그 규례를 따라 향기로운 냄새로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
7 일곱째 달 열흘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의 심령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8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9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십분의 삼이요 숫양 한 마리에는 십분의 이요 10 어린 양 일곱 마리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11 속죄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라
용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일입니다.
엊그제 유대인 친구로부터 문자.
히브리어가 쓰여있고, 그 밑에 한글로 정말 미안하다.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노래, 드라마를 좋아하는 친구여서 한글을 좀 알았기 때문에, 한글까지 미안하다라고 썼다.
히브리어의 내용이 무엇이었냐면,
“내가 상처를 줬거나, 말이나 문자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줘요. 미안합니다.”
왜 갑작스럽게 이러한 문자가 바다 건너 이스라엘 땅에서 한국으로 날라왔을까?
사실 엊그제는 이스라엘 절기 중 욤 키푸르라고 하는 날이었다. 이 날이 무슨 날이냐하면, 바로 대속죄일이다.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을 보면 나오는 날이다.
민수기 29:7 “7 일곱째 달 열흘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의 심령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이 대속죄일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다. 이 때 백성들은 함께 금식을 하고 회개하며, 안식함으로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했다. 오직 자신의 죄를 토해내는 일만 하는 날이 바로 이 대속죄일인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대속죄일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거나 혹은 회당이나, 통곡의 벽 같은 곳에 가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그렇게 한다. 그리고 아까 유대인 친구로부터 받았던 문자처럼 지난 1년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먼저 자신의 지인 친구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용서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게 행위지향적이라고 말할지라도, 1년에 한번 그렇게 주변 사람들과 용서를 주고 받는 일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진실로 알게 모르게 우리가 관계 맺는 많은 사람들과 상처를 주고 받는다. 늘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인격 수준이 높은 관계 속에서는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긴장감이 상당히 높게 지속된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감이 느슨해지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한 상처가 가득한 관계가 한 성회로 모이고자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일곱째 달 초하루에도 성회로 모이라고 하고, 일곱째 달 열흘 날에도 성회로 모이라고 하신다. 성회는 히브리어로 미크라-코데쉬이다. 코데쉬는 거룩. 미크라는 부르다 소집하다 낭독하여 읽다 등의 뜻이 있다. 즉 예배의 자리에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성회에 혼자 나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배의 자리에 교회 가는 날에 혼자 따로 예배한다거나, 공동체와 함께 예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풍성하게 함께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배의 오늘 “용서”라는 단어에 키포인트를 잡고 이해해본다면, 우리가 서로 간에 용서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은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거룩한 헌신이다.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조차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화목제물로 받으셨다. 그 용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우리는 그제서야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일이라는 것이다.
유대인 친구가 먼 타국의 친구에게까지 자신의 알게 모르게 지었을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용서가 자연스러워지길 기대한다.
특별히 오늘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때, 더 큰 기쁨과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려면, 우리 안에 있는 용서할 수 없었던 마음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용서를 생각하며 기쁜 주일 아침을 맞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