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8 금요기도회: 마태복음 17:1-13
0 ratings
· 113 viewsNotes
Transcript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7:1-13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후부터 비가 많이 오고 있는데요. 이 비를 뚫고 함께 기도하러 잘 나오셨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똑같이 내리는 비를 보더라도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비라는 것을 아는 우리는 그저 자연의 섭리나 우연에 의해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비라는 것을 알고 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기도회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먼저 말씀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아주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하신 변화산 사건에 대한 말씀인데요.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다가 갑자기 행하신 일이데요. 이것을 통해 동행한 세 제자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으셨는지를 살피고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피고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변화산 사건은 마태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냐면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신비적이고 놀라운 모습으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마태복음 초반에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를 제외한다면 이 변화산 사건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신 순간도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산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길 원하셨는데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왕인 “메시야”라는 것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7장 바로 직전인 16장 2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6일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셔서 자신이 변모한 모습을 보여주시는데요. 바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왕적 통치를 실행할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6일 후라는 것은 16장 28절의 말씀 후에 바로 그 직후에 보여주심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왕권을 가진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알리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 특별히 마태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모세를 통해서 알리셨다는 겁니다.
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모습으로 변화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난다는 것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출애굽기 34:29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리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계시지만 사실 신적인 존재이심을 보여주고 계시는 부분입니다. 같은 성경인 마태복음 28:3 에서 천사의 모습을 옷은 눈 같이 희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평행본문인 마가복음 9:3 에서는 이것을 더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바로 아무리 빨아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도 깨끗하고 하얀 옷을 예수님께서 입고 계시는 모습으로 변화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옷이 희고 빛나는 현상은 구약과 유대 전통 속에서도 신적인 존재에게 해당하는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처럼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신적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변화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동행한 세 제자는 예수님을 죽은 모세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이 인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점은 모세가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하나님과 독대했을 때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서 보았던 신적 영광의 반사에 의해 얼굴에서 빛이 난 것, 즉 하나님의 광채가 모세에게 반사가 되어 빛이 난 것이지만, 예수님에게서 광채가 난 것은 사실 예수님의 본질에 속한 광채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원래 광채가 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 자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 모습이신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금 세 제자와 함께 계시지만, 사실 원래 모습은 신적인 존재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여기까지만해도 예수님은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놀라운 장면을 세 제자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그저 단순히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고 계시나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많은 의미가 담긴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는 것에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둘 다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불병거를 타고 회오리바람에 의해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며, 느보산에 있었던 모세의 죽음은 신비로 가득한 죽음이었습니다.
신명기 34장을 보시면 모세의 죽음을 기록해두었는데요. 여기에서 모세가 죽은 뒤에 그의 장례를 치렀지만,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34장 7절에서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가 때가 되어 연로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유대 전통에서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아있을 때 데리고 가셨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의 1차 독자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염두하였을 때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나누신다는 것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대는 죽음을 맛보지 않은 모세와 엘리야가 마지막 날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세와 엘리야가 다시 돌아오는 그 날은 메시야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시는 모습을 유대인인 세 제자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임을 알리시고 계시다는 겁니다. 16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이 세 제자들에게 직접 눈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다른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고 계시는데요. 바로 5절에서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마찬가지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바로 모세와 엘리야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그 자체이심을 나타내고 계시다는 겁니다.
모세 때처럼 하나님꼐서는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예수님은 백성들로부터 배척과 고난을 당하실 겁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와는 다르게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미래에 “나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지만, 모세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는 아주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하심으로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면 좋으실텐데 왜 세 제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와 예수님께서 알리시는 메시야의 모습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여 번영하였던 것처럼 지금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지만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라들을 정복하시고 위대한 이스라엘 국가로 만드실 것을 유대인들은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실 메시야의 모습은 고난과 죽음에 처하는 메시야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 장인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하셨는데,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메시야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역정을 내면서 “그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을 겁니다”라며 강력하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던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타내실 메시야의 모습은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12절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엘리야는 바로 세례 요한이며 세례 요한처럼 자신도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9절에서는 자신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기 때문에 죽음과 부활이 앞으로 성취하실 예수님의 사명인 한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 명이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요. 하나는 모세가 아론, 나답, 아비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오른 것을 연상시키기 위해서 이 세 명을 데리고 가셨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나타내신 것이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언을 만드시기 위해서 세 명을 데리고 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직후 장인 18장을 보시면 권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확증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세 사람이 있으면 명백한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모습을 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4절인비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초막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반응은 우리가 여기 있게 되어서 기쁘다 또는 특권을 받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 잘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이 변화산 사건의 방관자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큰 유익을 끼치는 자입니다. 지금 주님과 세 제자가 있는 산 정상은 예수님, 모세, 엘리야처럼 존엄한 자들을 환대하기에는 적절한 장소가 아닙니다. 현실적인 베들는 사넹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재료를 사용하여 그들의 존엄에 걸맞은 거처를 제공하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장소로 환대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손님을 환대하였던 아브라함과 같이 말입니다.
만일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면 앞에 16장처럼 예수님께서 그의 잘못을 수정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말하듯이 이제 베드로는 이러한 놀라운 광경을 보고서 자신이 이러한 황홀경에 계속해서 매료되고 싶어서 그리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환대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아주 적절한 반응입니다.
또한 구름 가운데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해 제자들이 비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두려워한 것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나 천사와 같이 신적인 존재들과 만날 때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는 반응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서도 이러한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7절에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8절에서 제자들이 눈을 들고 예수님과 주위를 둘러보니 예수님 외에는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제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이제 세 제자들에게는 참 메시야이신 예수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운 모습으로 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심으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와는 다르게 주님은 산에서 내려가시면서 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난을 받을 메시야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왕의 모습은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위대한 제국을 만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이시며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분은 왕이시자 고난받으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것은 굉장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예상을 예수님께서는 뛰어넘으시는 왕으로서 이 교회를 통치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메시야적 통치, 왕적 통치를 이 교회 안에서 직분자들을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론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기적적이고 놀라운 방법, 또는 신비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일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일하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별히 이 직분자를 통하여 자신의 왕적 통치를 이어가십니다. 자신이 성취한 메시야적 통치를 이 교회를 통해 이어가십니다. 교회가 약해보이고 직분자들이 별볼일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조차도 연약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셔서 메시야적 통치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왕적 통치를 계속해서 이어가실 수 있도록 특별히 이 교회를 위해,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딴 길로 세지 않고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내는 교회와 직분자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도 우리를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나타내어 그들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더라도 우리의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걸으셨듯이 우리는 그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가장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인 동시에 고난 가운데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메시야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고난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셨고, 우리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가 아닌 예수님의 메시야적 통치가 이 교회와 직분자를 통해 이뤄지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날마다 교회와 직분자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통치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