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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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작가, 한강. 하지만 그녀는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쁨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결단이 이해가 됩니다.
한강 작가는 늘 인간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작품을 써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항쟁의 아픔을 다룹니다.
폭력의 현장을 겪은 이들의 상처와 슬픔을 강렬하게 묘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레미야애가 역시 한 민족의 깊은 고통을 기록한 책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남유다의 멸망과 그로 인한 엄청난 비극 속에서 나온 슬픔과 탄식의 노래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종종 우리는 이런 비극을 목격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의 참혹한 모습을 본적 있으신가요?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성수대교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최근의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는 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예레미야애가 1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받는 이웃에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본론1]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과 감사는 꼭 갖춰야할 덕목으로 여겨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기쁨과 감사를 그리스도인의 필수 언어이자 신앙의 중요한 지표라고 여깁니다.
반면 슬픔과 괴로움은 자주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정죄당하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때로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장에서 슬픔을 억지로 억누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천국에 가셨으니 나는 너무 기뻐”라고 말하며, 억지로 슬픔을 감추고, 기쁨을 강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슬픔과 괴로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쁨과 감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슬픔과 고통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것을 억누르거나 외면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괴로움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무시하면 결국 남의 고통에도 둔감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만 마치 믿음인 것인것 처럼 여기다가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외면할때가 있습니다.
물론 슬픔과 괴로움은 때로는 우리가 직시하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외면하면 우리의 내적 질서도 무너지게 됩니다.
슬프고 괴로우면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다윗은 얼마나 자신의 괴로움을 솔직하게 호소합니까?
시편 22:14-15 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애가는 시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극도의 슬픔을 무엇으로 표현할수 있을까요?
시밖에 없습니다.
시는 머리로는 모두 이해할수 없는 장르입니다.
이 글을 마음으로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22절의 히브리어 알파벳 시로 쓰여졌습니다.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장만 66절로서 알파벳 하나에 3절씩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마다 이 시를 기억하고 부르짖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은 "아, 슬프다"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슬프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애카’입니다.
‘애카’는 원래‘어찌하여’라는 강렬한 탄식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애가의 원래 제목은 ‘아 슬프다’ 또는 ‘어찌하여’입니다.
이 시의 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는 매우 슬퍼합니다.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1장 1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어찌하여 이 도성이 적막하게 되었는가?"
예루살렘은 한때 수많은 순례자들로 붐비던 도시였습니다.
명절마다 처녀들의 춤과 노래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폐허가 되어 과부처럼 의지할데 없는 외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존경받던 여왕의 모습이 아니라 비천한 종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고통스러워하며 탄식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고통을 보며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7-8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며 원수들은 좋아하며 조롱합니다.
누군가에게 조롱거리가 되는것보다 더 고통스러운게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동양처럼 수치문화가 있어 수치스러운 것을 죽는 것보다 더 한 고통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고통은 존재합니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 왜, 어째서 저입니까!”
슬픔과 절망 속에 부르짖는 이런 울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서 우리는 이런 깊은 슬픔을 겪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밤 늦게 TV에서 속보로 뜬 아비규환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어째서’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비극적 현장이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가족중 어떤 어머니가 땅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조롱하고, 그들의 슬픔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고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중에도 이태원 참사에 대해 막말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할로윈이라는 귀신 축제가서 죽은 것이다, 우상숭배하다 심판받은 것이다’라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데 그 아픈 곳에 소금을 뿌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아들이 이태원 참사로 죽었는데 교회에서 말도 제대로 할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귀신축제가서 죽었다고 사람들이 흉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슬픔을 외면하고 조롱한다면 우리는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영적 좀비와 같은 것입니다.
[본론2]
그러면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애가 1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1장 2절입니다.
"밤마다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르며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도다."
예루살렘의 고통은 단지 망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슬픔은 누군가 함께 아파해주고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도 말합니다.
"그가 심히 비참하여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이 구절들은 고통받는 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임을 보여줍니다.
고통 그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외로움을 깊이 공감하며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낍니다.
16, 17절에도 나옵니다.
고통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고통받는 자들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행동입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 예루살렘이 고통 속에서 가장 아파하는 것은 이 위로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아파해주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말로 위로하려 하면 안됩니다.
말로 위로하려는 시도는 때로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욥이 고통을 당할 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 가장 잘한 것은 말을 하기 전에 욥과 함께 일주일간 조용히 함께 있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욥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때로는 말보다는 함께 있는 것 자체가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함께 있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위로가 기도해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게으른 위로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그들과 함께 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겉으로는 괜찮은척하지만 고통가운데 속으로 울고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엄청 길게 하지는 않았지만 목회를 하면서 느낀게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말못하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말할수 있으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한테도 말할수 없는 은밀한 아픔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목회자로서 그냥 기도해줄께 하면 쉬운 결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게으른 위로입니다.
진짜 위로는 아파하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담당했던 애들중에 저와 오랫동안 만남을 지속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왜 저와 계속 교제를 나눌수 있을까요?
그들이 힘들고 아파할때 제가 함께 있어줬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함께해준 애들만 제 곁에 남았습니다.
진짜 위로는 기도해주는데서 그치는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셨고 죽음까지도 경험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짊어 지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동정과 위로를 베푸셨듯 우리도 이웃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론3]
그러나 우리의 위로가 여기서 그치면 안됩니다.
인간의 위로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참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최근에 제 주위에 큰 고통을 겪는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과 대화할 때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피 울기도 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기조차 싫습니다.”
그분은 목사님이신데도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그 문제를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꺼려진다고 하시더군요.
슬픔과 분노를 다시 경험해야 하니까 기도가 싫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쉽게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일 수 있습니다.
목사인데 기도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못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분이 조금씩 힘을 내어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계속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목소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한 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울부짖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응답을 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예언자였음에도 그에게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어쩌면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말문이 막힐까 봐 그런 것 같다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도 섣불리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마음껏 쏟아놓으라는 의미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듣지 않고 계시는 게 아닙니다.
침묵하시지만, 함께 울며 슬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기도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아픔을 쏟아낼 시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참된 위로와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침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통 속에서도 함께 울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진정한 평안과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감정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TV에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 표현을 보고 그것을 따라 배우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기쁨과 감사만이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슬픔과 괴로움을 외면하며, 모든 문제를 긍정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주셨습니다.
슬프면 울고, 괴로우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따지고, 불평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옆에 있고 싶어 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옆에는 있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셨듯이, 우리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이 "함께 걷는 교회"입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그들의 고통 속에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는 말하지 못한 고통을 홀로 견디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들은 우리의 위로와 함께함을 필요로 합니다.
이번 주에 그들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작은 행동이 그들의 삶에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안에 참된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셨듯이, 이제 우리가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걷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 걷는 교회가 되어, 주위를 살피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며 하나님께 인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들 곁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걷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믿음의 길임을 깨닫고, 우리가 모두 그 길을 함께 걸어가길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