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0:23-3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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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장 23-33절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와 지식이 충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중심은 언제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니, 우상 제단에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변함없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10장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승 숭배하는 자리와 문화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도시입니다. 그래서 도시 전체에는 우상 숭배의 문화가 팽배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은 우상 문화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 문화에 익숙해졌고, 우상 숭배 현장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그들과 교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깐, 사람들이 오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우상숭배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샀습니다.
15절입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여기서 지혜 있는 자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빗댄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절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고, 그러한 문화와 자리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8-21절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성경은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문화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3절은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여기서 “덕” 은 “오이코메오” 라는 단어인데, 짓다, 세우다, 강하다 하다, 누군가의 기초가 된다;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눈빛, 표정, 말,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본이 될 때, 우리는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24절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 됩니까?” 이웃에 대한 정의조차도 율법 교사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한 이야기를 통해 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인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 물으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네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율법 교사의 사고 관점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사고를 계속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적 가치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당시 시장에서 판매하는 고기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우상 숭배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25절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을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절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이 말씀은 시편 24편 1절의 말씀은 인용한 것입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식사를 하기 전 낭송하는 기도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유대 민족만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만 복 주신다고 생각했기에 이 말씀을 읽고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부르시고 택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신앙의 기준을 하나 제시합니다.
29절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신앙의 중요한 원리로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지혜가있는 성도라면,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조차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의 자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우리의 태도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해진다면 금하라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죄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것은 덕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다고 한다면, 안 먹겠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31절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장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든 사람을 기쁘게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장의 결론을 말합니다. 사랑과 생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장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바울 뒤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이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 뒤에 서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말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광대하심을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16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바울은 고린도교 성도들에게 축복의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좀 더 자유를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함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몸 설명)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교회와 가정을 비롯해 모든 관계를 분열시키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 사단의 전략에 지금,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성찬식은 그리스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떡을 “떼다” 동사는 헬라어로 “찢겨지다, 부서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이 찢기고 부서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지체들과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권리, 우리의 유익을 주장하기 전에 상대의 권리와 유익을 먼저 생각하며, 주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