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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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21장 “내가 예수 믿고서”
고린도전서 6:12-13
“모든 것이 가하나”
2024. 9. 23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모든 것이 가하나”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형제들끼리 서로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회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 세상법정에까지 가져가지 말라는 거예요.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참된 성도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음행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는데요. 자, 오늘 본문 1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아멘.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잘못된 자유에 대해서 먼저 비판을 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이 말은 아마도 고린도교회의 슬로건이었을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정말로 온갖 잘못된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유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자유롭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까? 빨간불인데 가도 됩니까? 아무데나 쓰레기 버려도 됩니까? 안 돼요. 이런 사소한 것도 안 되는데, 동성애나 근친상간이나 도둑질이나, 이런 큰 범죄는 당연히 안 되겠죠.
여러분 자유에는 분명히 선이 있습니다. 선을 지키면 자유지만, 선을 넘으면 범죄가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선을 지키지 않았어요. 마음대로 선을 넘었습니다. 자기들이 범죄를 하고 있으면서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여기서 “가하다” 라는 말이 헬라어로 “엑세스틴” 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권한을 얻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는 거예요. 누구에게요?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그래서 동성애를 해도 되고, 근친상간을 해도 되고, 우상숭배를 해도 되고, 다 해도 된다는 겁니다.
완전히 잘못된 거죠. 제정신이 아니에요. 설마 예수님이 그런 권한을 주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이 12절에 교인들의 슬로건을 인용해서 반박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나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라고 반박을 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었죠. 선악과를 먹는 것도 자유였어요. 그러나 선악과를 먹는 것은 유익이 안 된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진짜로 다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선을 지켜야 돼요.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뒤에 다시 한번 이 말을 반복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아멘.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는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얽매이다는 말이 헬라어로 “엑수시아조” 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지배당하다, 노예가 되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자유로우면 오히려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강원랜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요. 강원랜드 아시죠? 카지노, 도박 하는 곳이에요. 여기에 가면 도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집이며, 재산이며 다 날리고, 가족들한테까지 버림받고도 여전히 도박의 노예가 돼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도박의 노예가 됐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친구 따라서, 재미로 한번 두번 자유롭게 하다가 점차 거기에 빠져드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노예가 되어 있는 겁니다.
바울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거예요. 마음껏 자유를 누리다가는 나도 모르게 노예가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선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되, 한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려야 되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먹지 말라는 것은 먹지 않고, 한도 내에서만 누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는 그러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밑에 13절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유행하던 또 하나의 슬로건을 비판하는데요. 13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아멘.
고린도교인들이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라는 말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떠들도 다녔어요.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이런 말입니다. “음식은 내 배에 들어오기 위하여 있고, 내 배는 음식을 집어넣기 위하여 있다” 말 그대로 음식을 그냥 먹고싶은대로 먹자는 말이죠. 눈앞에 음식이 있어? 그냥 먹어. 저 음식은 배에 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리고 너는 저 음식을 먹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무절제하게 음식을 그냥 돼지처럼 처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라는 말을 아시죠?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래? 아니면 배부른 돼지가 될래? 고린도교회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로 작정한 겁니다.
육신의 욕심을 따라서 무절제하게 사는 것이죠. 먹고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사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이것 저것, 음식이며 배며 하나님이 다 없애버리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 배가 음식을 집어넣을려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생명활동을 통해서 힘을 얻고 주의 일하는데 쓰임받기 위해서 배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는 게 아니에요. 오직 주를 위하여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우리가 삶의 목적을 뚜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우리는 오직 우리 주님을 위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이 몸이 내께 아니에요. 주님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돼요.
자, 그런데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듯이, 위 주님도 우리를 위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13절 끝에 보니까,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아멘.
우리 주님이 우리 몸을 위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은 우리 개인의 몸을 의미함과 동시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의미해요. 주님은 우리 개인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어요. 그러면 우리들도 마땅히 주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맞겠죠. 그래야 계산이 맞잖아요. 주님과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존재해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바치셨어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서 우리 목숨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주를 위해 죽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우리가 힘을 다해 주님을 위해 섬기라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 안에서 선을 지키며, 절제하며, 오직 주를 위하여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개인에게 유익이 되고,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