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불의를 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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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고린도전서 6:1-11
“차라리 불의를 당하라”
2024. 9. 20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법정에서 송사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인데요. 바울이 음행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다루던 중에, 갑자기 세상 법정에서 송사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왜 뜬금없이 송사에 대한 말을 하는가? 아마도 교인들 중에 음행에 대한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이 어머니와 동침을 하는 근친상간 문제를 비롯해서,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법정에 갖고 가서 해결을 하려고 하는 일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자,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바울이 책망을 하고 있죠. 너희가 교인들끼리 다툼이 있으면, 성도 앞에서 해야지, 왜 굳이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을 하느냐? 이렇게 책망을 하고 있어요. 교인들끼리 다툼이 있으면, 당연히 교회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 왜 불의한 자들 앞에까지 찾아가느냐는 거예요.
여기서 불의한 자들은 세상의 재판관들입니다. 바울은 재판관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재판관은 의로워야 되잖아요. 재판관이 불의하면 어떻게 올바른 판결을 내립니까?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가 없죠.
물론 바울이 말하는 불의는 도덕적으로 불의하다는 말이 아니죠.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저 밑에 6절에 가면, 불의한 자들을 다시 이렇게 표현을 해요. “믿지 아니하는 자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다 불의한 자들인 겁니다. 그들이 재판관으로서 정직하고 윤리적이고 성품이 훌륭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자들입니다. 우리가 정직하다거나 윤리적이라서 의로운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기 때문에, 의로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의로운 자들이 어떻게 저 불의한 재판관들 앞에서, 같은 의로운 그리스도인을 고발할 수가 있냐는 거예요.
의로운 자가 어떻게 불의한 자에게 판단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밑에 2절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해요. 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아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판단을 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교회 안에 작은 일도 감당을 못해서 세상법정에다가 맡기느냐. 이런 말이죠. 주객이 전도된 거 아닙니까? 세상을 판단할 성도들이 거꾸로 세상에 판단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밑에 3절에 보면, 우리가 또 무엇을 판단할 수 있어요? 천사를 판단할 수 있죠.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우리가 천사도 판단을 할 수가 있는데, 세상을 판단하는 일이야 뭐가 어렵겠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 뭔가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충분히 우리가 그것을 판단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기어이 세상법정에 갖고 가서 시끄럽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요. 우리가 무조건 소송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상의 문제나, 여러 세상적인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얼마든지 소송을 할 수 있어요. 심지어 바울도 로마 법정에서 상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5장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해서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유대 총독인 베스도에게 내가 가이사 앞에서 심문을 받겠다고 상소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죠. 로마 시민권자는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어요. 바울이 볼 때, 여기 가이사랴에서는 답이 안 나오거든요. 대제사장이며 바리새인이며, 유대인들이 난리를 치는 통에 총독이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바울이 여기 유대땅에서는 답이 안 나오니까, 내가 직접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겠다고 요청을 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없는 이방 땅에 가서 내가 재판을 받으리라, 라는 생각으로 상소를 한 것이죠.
이처럼 바울도 세상법정에서 상소를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얼마든지 세상법정에서 고발도 하고 송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송사가 절대로 같은 믿음의 형제를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법정에서만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당연히 세상법정으로 가져가야겠죠. 하지만 교회 안에서 판결할 수 있는 문제는 당연히 교회 안에서 해결을 해야 돼요.
교회는 충분히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이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 교회잖아요. 교회가 거룩함으로써 교회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겠죠. 권면도 있고, 훈계도 있고, 책망도 있고,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권징도 있어요. 권징은 교회 안에서 잘못한 자를 징계하는 거예요. 이로써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서 권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세상법정으로 가는 겁니다. 교회가 자정작용이 안 돼요. 왜 안되냐면, 교회 안에 판단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지금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우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교인들 간에 분쟁이 있어도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랑 가까운 쪽 사람 편을 들어줘요. 그리고 설령 중립을 지킨다고 해도, 의심을 해요. 저 사람이랑 친해서 저 사람한테 유리하게 판결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의심을 하고 판결에 불복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거예요. 차라리 세상법정이 더 신뢰가 간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5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린도교회는 사실 지혜 있는 자가 많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지혜가 세상적인 지혜였다는 것이죠. 철학, 과학, 수사학, 이런 지혜는 뛰어나요. 쉽게 말해서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굉장히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겁니다. 지혜가 있어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에 다툼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그 지혜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더라는 겁니다.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교회의 지도자며, 장로며, 집사며, 아무도 지혜가 없어요. 지혜로운 자가 없으니까 문제 해결은 안 되는데, 다툼은 계속 일어나요. 그래서 세상법정으로 가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7절인데요. 7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아멘.
바울이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세상법정에서 서로 고발하는 것보다, 차라리 형제에게 져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죠. 져주기 싫어서 기어이 세상법정에서 서로 고발해봤자, 이미 너희가 다 허물이 생긴다는 거예요.
여기서 허물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헤테마” 라는 말인데, 이 말은 “실패, 패배”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법정에 고발하는 순간에, 소송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미 너희가 다 패배한 자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법정에서 판결을 받으면,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죠. 그러나 세상법정에서 이겨봤자 뭐하냐는 거예요. 신앙의 형제와 원수가 되고, 교회 안에서는 덕을 잃고, 교회 밖으로는 명예를 잃어요.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 아닙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져주라는 겁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그래도 져주라는 겁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는 형제간의 대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아멘.
너의 형제, 너의 동포, 너의 이웃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 그리고 그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살다 보면,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의견차이와 오해가 큰 싸움으로 번질 수가 있어요. 그럴 때 세상에서는 법정싸움까지 가서 기어이 승패를 가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무엇이 중요합니까?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룩함은 곧 구별됨이에요. 성도는 세상사람들과 구별돼야 합니다. 달라도 뭔가 달라야 돼요.
말이 달라야 하고, 행동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한 일을 당했을 때 반응이 달라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해서는 안돼요. 구별돼야 합니다.
레위기 말씀처럼, “원수를 갚지 말며,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역전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는 자는 이기는 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가 되고, 약한 자는 강한 자가 되고,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가 되며, 죽는 자는 사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어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억울한 심정은 주님께 쏟아놓고, 내가 먼저 형제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공짜가 없어요. 반드시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역전의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