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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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고린도전서 7:6-9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2024. 10. 4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음행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결혼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고린도교회에는 극과 극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음행이 심해서 매춘과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관계를 혐오해서 부부사이에도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울은 이러한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들과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결혼을 하면 음행을 피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혼을 하면 부부간에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특별히 지난 시간에 성관계에 대한 의무를 말씀드렸는데요. 부부는 반드시 자기 배우자하고만 성관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성관계를 원하면 그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의무를 부부가 지켜야 하는데, 첫번째 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이라면, 두번째 의무는 권면입니다. 지켜야 하지만, 부득이한 상황에는 못 지킬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내가 이 말을 한다고 해서, 이 말이 명령이 아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죠. 여기서 바울이 한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바로 위에 5절 말씀이죠. 부부간에 기도 때문에 잠깐 성관계를 멈출 수는 있지만, 그 외에는 반드시 배우자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말이에요. 아무 이유 없이 성관계를 거부하지 말아라.
바로 이 말이 명령이 아니라, 허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은 하셨지만, 성관계를 거부하지 말라는 명령은 안 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명령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명령을 만들어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라고 권면을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서 오늘 본문 7절에 가서는 “나와 가기를 원”한다고 말을 하는데요.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아멘.
바울이 자신을 모델로 내세우면서,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을 해요. 여기서 “나와 같기를 원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있는데요. 지금 바울은 은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7절에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다고 말하고 있죠? 그러니까 바울은 모든 사람이 내가 가진 은사를 갖기를 원한다, 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바울은 무슨 은사를 가지고 있었는가? 바로 절제의 은삽니다. 절제의 은사. 성관계를 하지 않고도 성욕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절제의 은사를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아내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절제의 은사를 갖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우리가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살 수가 있겠어요? 바울이 특별한 케이스죠. 절제의 은사가 흔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절제를 강요하지 않아요.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절제의 은사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절제의 은사가 없으면 결혼을 해야 돼요. 혼자 살다가 사고 치지 말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야 됩니다.
자, 그러면서 8절에 가서는 이제 재혼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데요. 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아멘.
바울이 한 번 결혼했던 사람들에게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합니다. 특별히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말하는데요. 하나는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이고, 또 하나는 과부들입니다. 과부들은 남편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없는 여자들이에요. 그러면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사람들은 아내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내가 없는 남자들이죠. 쉽게 말해서 홀아비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바울이 지금 홀아비들과 과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는 배우자가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서 지금 배우자가 없이 살고 있는 자들에게, 나처럼 그냥 독신으로 지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겨요. 과연 바울은 결혼을 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결혼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대체적으로 바울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들은 바울이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에 바울이 결혼을 안 했다면, 성경에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사회의 최고 권력기관이에요. 이곳에서는 주로 율법을 해석하거나, 종교재판을 주관거나 성전의 치안을 유지하는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기관은 당연히 권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죠. 오늘날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가 합쳐진 기관이에요. 다시 말해서 국회와 법원이 합쳐진 엄청난 기관입니다. 국회의원이 판사 노릇을 하면서 재판까지 하는 거예요. 엄청난 권력이죠.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에요. 공회는 그 기원이 과거 모세 시대의 70명의 장로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공회는 70명이 정원이에요. 바울이 이 70명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대제사장까지 해서 총 71명으로 공회가 구성됩니다.
그런데 공회원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이기 때문에, 공회원이 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장관 하나 임명할 때도 청문회를 열어서 이 사람에 대해서 세세하게 검증을 하잖아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문제는 없는지 따져봅니다.
공회원도 마찬가지예요. 공회원도 임명직입니다. 이 사람이 공회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 세세하게 따져보고 검증한 후에 임명을 해요. 그런데 여기에 자기 사람을 꽂아넣기 위해 얼마나 물밑작업이 치열하겠어요? 뭐 하나라도 걸리면 그걸 물고 늘어져서 파토내버리고, 자기 계파의 사람을 밀어줍니다.
예수님을 불법으로 기소해서 죽게 만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공회가 굉장히 타락한 기관이었거든요. 공회원 하나 임명하는 데도 얼마나 더러운 뒷거래가 오고 갔겠습니까? 그런 더러운 암투를 이겨내고, 바울이 공회원이 된 거예요.
우선 공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크게 다섯 가지 조건이 있는데요. 첫번째 조건은 그가 율법에 해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일을 해야 되니까 당연히 율법을 잘 알아야겠죠.
두번째로,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재판을 해야 되니까 당연히 정직해야 돼요. 그리고 세번째로, 나이가 30세 이상이어야 합니다.
네번째로, 집안이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이 사람이 뛰어나도, 집안이 안 좋으면 안 돼요. 좋은 집안에서 좋은 인물이 나온다는 절대적인 관념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집안이 좋아야 됩니다. 단순히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명성이 있는 집안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로, 결혼유무를 봅니다. 이 사람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잘 다스리는가? 유대사회에서는 결혼을 안 하면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안 해요. 만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해서 성인으로 인정이 되지만, 결혼을 안 하면 제대로 대접을 못 받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결혼을 안 했다고 한다면, 절대로 공회원이 될 수가 없어요. 애초에 서류심사에서 탈락입니다. 반대파가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분명히 결혼을 한 사람이에요. 안 그러면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그러면 이제 또 문제가 생기죠. 바울이 결혼을 했으면, 왜 지금은 아내가 없을까? 여기에 대해서 의견이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바울이 사별을 했다. 아내가 죽어서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이런 의견이 있고, 또 하나는 바울이 이혼을 당했다는 의견입니다. 이 중에 뭐가 맞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혼을 당했으리라고 봅니다.
남편이 공회원으로써 존경받고, 또 열심이 유별나서 교회를 잔멸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미쳐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다녀요. 그래서 사회에서 존경받는 집안에서 갑자기 손가락질 받는 집안이 됐어요. 심지어 남편이 집에도 안 들어와요.
그러니 어떤 아내가 이런 사람이랑 계속 살 수가 있겠습니까? 처가에서도 가만히 안 있죠. 사위가 갑자기 미쳤는데, 자기 딸을 내버려두겠습니까? 당장에 이혼시키고 데려가는 거예요.
물론 이런 내용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짐작만 하는 거죠.
어쨌거나 결론은, 바울이 한번 결혼을 했었고, 지금은 독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나처럼 재혼하지 말고, 그냥 독신으로 지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재혼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만약에 바울이 초혼을 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거역하고 아예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바울은 이단이 됩니다. 지가 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라고 합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초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재혼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명령은 아니에요. 재혼을 안 하면 좋겠는데, 해야 되면 하라는 겁니다.
자, 밑에 9절 봐 볼까요? 9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절제할 수 없거든, 다시 말해서 절제의 은사가 없다면 재혼하라는 겁니다. 애초에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재혼을 하든 삼혼을 하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마땅하지만, 절제의 은사가 있으면 굳이 할 필요가 없어요. 바울이 지금 이혼하고 독신으로 살다 보니까, 이게 좋거든요. 마음껏 세상에서 복음 전하면서 주의 일 하고 살아도 바가지 긁는 사람도 없고, 너무 자유로워요. 부부간에 지켜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삶을 추천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절제의 은사가 있어야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바울이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재혼의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의 문젭니다. 재혼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그래서 바울도 재혼을 해야 된다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지 않고,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겁니다. 안 하는 것이 좋겠지만, 하는 것도 가하다.
이처럼 성경은 반드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 그리고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그러나 명령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자유가 나에게, 또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지, 아니면 해가 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해도 좋으나, 유익이 안 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유익이 된다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우리가 바울과 같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독신의 은사나 절제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그 위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 누가 앞길을 막아도 멈추지 않고,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보석과도 같은 믿을 가지고,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하여서, 교회를 위하여서 섬기며 헌신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교회에 덕이 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