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9 고린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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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1-9절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의 기원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려면 사도행전 18장 1절부터 18절까지 살펴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이 부부는 이미 로마에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 부부입니다. 그들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리자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와 있던 천막제조업자였습니다. 바울은 아굴라 부부를 만나 동업을 하는 동시에 선교를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지만, 대개는 천막을 만드는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개인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 년 반 동안 선교를 하고 아굴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방해와 그들이 일으킨 폭동을 피해 고린도를 떠나 시리아 안디옥으로 가다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남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아굴라 부부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인 아볼로를 만나게 됩니다.
<고린도 사회와 교회의 성격>
바울이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고린도라는 도시는 매우 특이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성격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배경과 기질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른 특별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좁은 반도에 위치한 자연적인 항구도시로, 동과 서를 잇는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노예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의 국제도시로서 헬라 사회와 로마 식민지의 전형적인 도시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의 구성원은 로마인과 헬라인뿐만 아니라 유대인, 시리아와 애굽과 소아시아에서 온 동양인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 모든 그룹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종교 신앙과 풍습과 종교 의식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적으로 혼합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고린도전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변호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에 사도권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우월감을 드러내기 보다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그들은 시비를 걸은 걸까요?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설교를 굉장히 못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설교를 들으니 그가 사도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 어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바울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면 어느 정도 사례를 주니깐, 바울이 사도권을 가지고 사례를 받는게 맞느냐?” 하고 말입니다. 반면, 아볼로라는 사람은 성경을 가르치는데 말을 정말 잘 합니다. 사도행전 18자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행 18:24-26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할 뿐 아니라 탁월하고, 말이 논리적이며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대인들과 논쟁해도 그들의 궤변과 논리를 넘어섰습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아볼로와 바울을 비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어느날 베드로가 율법과 전통을 강조하니 성도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회안에 당파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1절에 “나는 바울파, 나는 게바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그리스도 파”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이로 인해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1년 동안 열심히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파벌 싸움을 하고 있으니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래서 그는 편지를 씁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교회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일까요?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부름을 받아 모인 공동체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보니깐, 고린도 지역 내에 “에클레시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자신의 취미에 따라, 성격에 따라, 사는 지방에 따라, 오늘날의 동호회 수준의 에클레시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지금 바울은 교회 앞에 하나님의 교회라고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아닙니다. 오직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은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주인이 성도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를 세속적인 에클레시아와 구분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사교 클럽이나 동호회나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그런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소유물이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오직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교회를 소개하면서 이같은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절
이 구절은 그냥 평범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이 인사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번도 순서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가장 먼저 나옵니까?
은혜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한 구속의 행위로, 인간의 공로로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거저 주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가 깨질 때 평강이 깨집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평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모두들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곧이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선언하셨고, 그 후 또 “다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선언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회복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참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일어납니다.
지금 바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가짜 사도권으로 공격당하는 상황입니다. 상식적으로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학벌로 방어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울은 자신의 변호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가치로 자신을 증명하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 이라고 고백합니다.
오직 은혜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속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샘 솟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좀 더 잘난 모습으로, 더 나은 스펙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 시킵니다.
목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스스로를 부인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장 8-9절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부터 난 의라”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면서, 그는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이 무수한 세상의 유혹 속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방법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한다면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향해 비웃을 것입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진노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평강을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 영역 가운데 은혜와 평강을 사모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
4절에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여기서 은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일반적인 은혜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은혜 때문에 주어진 감사입니다. “주신” 이라고 쓰인 헬라어 “δοθείση (디도이센)” 은 과거 수동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선물로 은혜를 이미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특별한 이유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단어를 114번 사용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11번 사용합니다. 이 은혜는 단순히 일반적인 영역 안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둘째는 은혜는 은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교회에게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고린도 지역은 수사학이 발달한 도시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언변이 좋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자신의 은사와 능력만 자랑하다 보니 누군가 앞에서 이야기를 해도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비판하며,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1장 5-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얼핏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를 칭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문맥을 보면 칭찬이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는 참 좋다. 언변도 좋고 사람도 많고, 은사도 많다” 라고 하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지금의 상태는 완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영적인 상태가 연약하니 더 견고하라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사를 다투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들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성도를 세우고, 성도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은사를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데, 상대방을 책망하는데, 정죄하는데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사는 결코 스스로를 잘난척 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거나 경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목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권면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요” 그 외엔 은사의 목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은사를 자신의 자랑으로 삼았고 그러면서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바울파, 아볼로 파, 게파 파, 그리스도 파로 나누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기위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의 슬로건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을까?”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를 적어 내려가면서, 그 편지를 받는 성도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갈 때, 그곳에 참된 평안과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선교 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부를 때,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서로 덮어 주고, 서로 받아 주고, 참아 주면서 함께 웃고 우는 것이 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 안에서 사랑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정말 우리교회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준비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 시기와 질투가 있는 분 있습니까? 저 사람이 보기 싫어서 마주치지도 않고, 스스로 피하고, 뒷통수만 보아도 짜증이 나고, 그래서 그로 인해 교회 나가는 게 불편하고....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에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 때문에, 그 관계가 깨져서는 안 됩니다. 그럴 거라면, 봉사가 없는게 휠씬 더 낫습니다. 봉사와 사역은 천천히 해도 괜찮습니다. 실패해도 됩니다.
비록 천천히 가더라도 우리가 우선 한 사람을 용납하고 안아 주면서 함께 동역하는 가운데 나아간다면 교회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계획 안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격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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