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신 그대로

고린도전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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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고린도전서 7:17-24
“부르신 그대로”
2024. 10. 11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부르신 그대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결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특별히 신자와 불신자 부부에 대해서 이혼하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불신자 배우자랑 살면서 마음이 안 맞고 힘들겠지만, 배우자를 버리지 말고 같이 살아라.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갈라서야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한번 참아봐라. 왜냐하면, 너로 인해서 너의 배우자가 믿음을 얻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혼하지 말아라.’ 이렇게 권면을 했어요.
그리고 곧바로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혼 문제를 다루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요. 내용의 흐름이 어색하게 보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전혀 어색한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신 그대로 지내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그대로, 독신인 사람은 독신인 그대로 지내라는 겁니다. 이혼문제를 하나님의 부르심과 접목을 시킴으로써 현재 모습 그대로 살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할례의 문제로 논점을 확장시키고 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단순히 이혼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할례와 무할례의 문제, 그리고 종과 자유인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부르신 그대로 지낼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억지로 우리의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헬라인들, 특히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믿음을 위해서 부부간에 성관계를 멀리하고, 심지어 이혼까지 불사했습니다. 이것은 헬라철학의 주장 때문인데요. 헬라철학은 영혼을 고귀한 것으로 보고, 육체를 더러운 것을 봐요. 그래서 육체가 영혼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육체의 더러운 활동을 일절 금지시킵니다. 성관계를 금지시키고,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극도로 금욕을 시켜요.
바로 이러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짓을 한다고 믿음이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 지킨다고 이혼을 하고, 믿음 지킨다고 금식을 하고, 믿음 지킨다고 자녀 양육을 등한시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대로,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지금 내 모습 그대로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을 하는 거예요. 자, 오늘 본문을 함께 보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는데요. 먼저 오늘 본문의 구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 본문은 이중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샌드위치 두 개를 겹쳐놓은 모양을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샌드위치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위아래에 빵이 있고, 안에는 야채가 있죠. 그런데 샌드위치 두 개를 겹쳐놨으니까, 구조가 어떻게 됩니까? 빵, 야채, 빵, 야채, 빵. 이런 모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딱 그런 모양이에요. 똑같은 빵이 17절, 20절, 24절에 위치해요. 부르신 그대로 지내라는 똑같은 말씀이 위, 중간, 아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빵 사이사이에는 두 종류의 야채를 집어넣었어요. 첫번째 야채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야채이고, 두번째 야채는 종과 자유인이라는 야챕니다. 이 두 가지 야채가 부르신 그대로 지내라는 빵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구조를 염두에 두고, 이제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빵입니다. 1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아멘.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앞에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라는 말을 덧붙였어요. 여러분, 주님이 각 사람에게 무엇을 나눠 주셨을까요?
문맥상으로 보면, 각자가 살아야 하는 인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인생을 나눠주신 겁니다. 부유한 인생, 가난한 인생, 건강한 인생, 허약한 인생, 수 만 가지 인생이 있어요. 그 각각의 인생 그대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 살고 있던 인생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그대로 살고, 독신인 사람은 독신인 사람 그대로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문제로 확장을 시켜서, 할례자는 할례자로 살고, 무할례자는 무할례자로 살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18절과 19절 말씀이에요. 이중 샌드위치 구조에서 첫번째 야채죠. 자, 18절, 19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아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을 해요. 유대인은 태어난지 8일이면 할례를 받기 때문에, 유대인은 곧 할례잡니다. 반면에 헬라인은 할례를 받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멀쩡히 있는 성기를 왜 포경수술을 합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이 할례가 신앙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데 굉장한 장애물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할례를 해야 된다고 말해요.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당연히 할례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을 반대하는 율법주의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와서 불법적으로 가르친 내용일 겁니다. 바울은 할례 받으라고 한 적이 없는데, 율법주의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서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가르친 거예요. 아마도 이런 식으로 가르쳤겠죠.
‘고린도교인들아,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믿음의 선배들이 다 할례를 받았고, 심지어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다. 우리가 어떻게 이 전통을 버릴 수가 있느냐? 우리도 예수님처럼 할례를 받아야지. 이 정도 각오도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냐?’
이런 식으로 교인들을 선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교인들이 듣고 보니까, 일리가 있거든요. 그래서 할례를 받는 교인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또 다른 교인들에게 너희도 할례 받으라고 전염을 시켜요. 할례가 일종의 특권이 되는 겁니다. ‘나는 할례 받았어. 나는 참 그리스도인이야. 너는 안 받았지? 너는 가짜야.’ 이런 식으로 할례자와 무할례자간에 계급이 생겨나요.
이 때문에 교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술렁거리고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 겁니다. ‘할례 하지마라.’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는데, 왜 할례를 하냐는 거예요. ‘할례 받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할례 받는다고 해서 믿음이 발전하는 것도 아닌데, 할례가 뭐가 필요하냐?’
이미 율법적인 모든 제약이 사라졌어요. 그 무엇도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할례자는 할례자인 그대로 들어가면 되고, 무할례자는 무할례자인 그대로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19절 끝에,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해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아멘.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아멘.
계명을 지키는 핵심이 뭡니까? 믿음과 사랑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핵심입니다. 할례를 했니 안 했니,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으면 그의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하느냐?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첫번째 야채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20절을 보겠는데요. 20절은 가운데 들어가는 빵입니다. 20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아멘.
17절에서 한 말을 반복한 겁니다. 부르심 받은 그대로 지내라. 그러면서 곧바로 두번째 야채로 들어가요. 21절부터 23절 내용인데요. 여기는 종과 자유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도 결론은 같아요. 종이면 종인 그대로 믿으면 되고, 자유인이면 자유인 그대로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이것도 하나의 장애물이었어요. ‘자유인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어떻게 감히 종놈이 예배를 드리러 와?’ 신분을 놓고 차별대우를 해요. 주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이고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다는 겁니다.
바울 시대에 종은 말 그대로 노옙니다. 노예가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전쟁에서 패배해서 포로가 된다든지, 또는 빚을 갚지 못해서 팔려간다든지, 또 범죄에 대한 처벌로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번 노예가 되면 다시 자유인으로 풀려나기가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물론 해방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주인이 해방을 시켜준다든지, 아니면 자기 몸값을 지불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주인이 아무 대가도 없이 노예를 해방시켜 주겠어요? 그리고 노예가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어봤자, 최저임금도 없는 시대에 어느 세월에 자기 몸값을 벌어서 갚겠습니까? 그냥 불가능하다고 봐야 돼요. 그래서 만약에 교회가 노예들을 못 들어오게 한다면, 노예들은 평생 교회 문턱도 못 밟아보고 인생을 마쳐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런 곳이 아니잖아요. 교회는 세상 어느곳보다 문턱이 낮은 곳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요. 믿음에는 귀천이 없는 겁니다. 국회의원이 오면 레드카펫 깔아주고, 노숙자가 오면 대문 닫아버리고. 그래서는 안 돼요. 교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2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아멘.
우리는 주 안에서 자유합니다. 자유인이든 종이든 동일하게 우리는 주께 속한 자유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다 똑같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량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모두가 다 죄의 노예였어요.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다 노예였어요. 그런데 주님이 자기 피값으로 우리를 사서 해방시켜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위해서 억지로 자유인이 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에게서 해방되기 위해, 돈에서 해방되기 위해, 음욕에서 해방되기 위해, 나를 다른 어떤 존재로 만들 필요가 없어요.
‘나는 아내랑 같이 있으면 자꾸 성관계를 하고 싶어져서 안 되겠어. 이혼해야지.’ ‘나는 할례를 안 받아서 할례자들 앞에서 기가 안 살아. 나도 할례 해야지.’ ‘나는 노예라서 교회 들어가기가 무서워. 나중에 자유인으로 풀려나면 그때 가야지.’
이처럼 우리은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장애물들로 인해서, 스스로 체념하고 나를 그 자리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장애물들이 이미 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사라졌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 사라지고 없어요. 없는 것을 왜 다시 세우냐는 말이에요.
현실에서는 우리가 사람의 노예일 수 있죠. 돈의 노예일 수도 있고, 권력의 노예일 수도 있어요. 우리 힘으로 어떻게 벗어날 수 없는 노예의 모습으로 놓여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 바울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아멘.
너희가 이미 값으로 사서 자유롭게 되었는데, 왜 스스로 종이 되냐는 거예요. “종이 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 안에서 이미 자유인이 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이 어떠하든지, 지금 사는 모습 그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을 붙잡고, 결혼했으면 결혼한 그대로, 이혼했으면 이혼한 그대로, 돈이 많으면 돈이 많은 그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그대로, 지금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혼할 수도 있어요. 재혼할 수도 있고. 또 갑자기 가난하게 될 수도 있고, 부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에 따라 우리 인생에 기복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흠집을 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믿음을 연단하여 정금과 같이 만들어내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든지,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주 안에서 자유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처럼,
이 시간에 주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 있습니다.
<주기도문>
<합심기도>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저녁집회를 위해서,
제자훈련을 위해서,
10월 27일 광화문 연합예배를 위해서,
태신자를 위해서,
우리교회의 아픈 성도들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오늘 각자 가지고 나온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우리 주님을 세 번 부르고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5:39“교회차를 타고 가실 분들은 기도를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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