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을 넘어 자유함으로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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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5:17-26
“장벽을 넘어 자유함으로”
2024. 10. 16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장벽을 넘어 자유함으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한 내용인데요. 지난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셨죠. 갈릴리 여러 동네를 다니시면서 병자들을 고치시던 중에, 나병환자를 만나서 고쳐주셨어요.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분문을 들어가기 전에, 먼저 오늘 본문의 구조를 한번 살펴보겠는데요.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개의 소단락으로 나눠집니다. 첫번째로 17절부터 19절이에요. 이 첫번째 단락에 소제목을 붙인다면, “중풍병자와 만나는 이야기” 라고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단락은 20절부터 24절이에요. 이 단락의 소제목은 “죄 용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단락은 25절, 26절이죠. 이 단락의 소제목은 “중풍병자와 헤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중풍병자와 만나는 이야기와 중풍병자와 헤어지는 이야기 사이에 죄 용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구조인 겁니다. 이것을 함께 한 단락씩 살펴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깨닫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먼저 첫번째 단락입니다. “중풍병자와 만나는 이야기”인데요.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중풍병자와 만나게 되셨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아멘.
지금 말씀을 보면, 누가복음에서 최초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굉장히 부정적인 자들로 묘사가 되죠.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부패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고 거룩하게 보이면서, 속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는 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1세기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만, 그 중에는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뒤에서는 딴주머니를 차고 있더라는 것이죠.
누가도 이것을 비판하는데요. 누가복음 16장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에요.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죠. 정말로 신실하고 거룩한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은 복음서에 딱 한 명 나옵니다.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 이 사람을 제외하고,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바리새인들은 다 부패한 자들이에요. 왜냐하면,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실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서에 안 나와요. 반면에 부패한 바리새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속 나와요. 예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을 한 거죠. 저들과 예수님을 대조하면서, 누가 과연 우리의 참된 친구이고, 참된 스승인지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처음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어떤 사람은 갈릴리에서, 어떤 사람은 유대에서,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왔어요. 그야말로 온 이스라엘 땅에서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출발지는 기록되어 있는데, 정작 지금 저들이 앉아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가? 마가복음 2장 1절에 보면, 이 장소가 가버나움이라고 명시되어 있거든요. 마가복음 2장 1절 봐 볼까요?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아멘.
수 일 후에,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나서 수 일 후를 가리키는 겁니다. 수 일 후에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누군가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이 집은 시몬 베드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몬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일찌기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시몬이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집이 시몬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명확하게 누구의 집인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어요. 어쨌거나 지금 예수님이 누군가의 집에 계셔요.
그리고 그곳으로 온 이스라엘 땅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몰려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왜 몰려왔을까요? 마가복음 2장 2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고, 예수님은 복음의 도를 가르치고 계셨던 겁니다.
자, 그런데 다시 오늘 본문 17절로 돌아와서 보면, 17절에는 그런 내용이 없죠.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다는 말이 없고, 그냥 앉아있다고만 말해요. 그래서 누가복음만 봤을 때는 이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뭘 원해서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 위에 15절에 보면,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왔거든요. 이것을 구조적으로 보면, 15절에 수많은 무리가 나오고, 곧바로 예수님이 기도를 하러 가셨어요. 그리고 그 뒤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나오는 겁니다.
자, 이것을 화면으로 한번 봐 볼까요? (ppt) 여기 보면, 16절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죠. 그리고 바로 위에 수많은 무리가 있고, 밑에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있어요. 예수님의 기도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연결되는 겁니다.
자,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해서 봐 볼까요? (ppt) 바깥쪽에 나병환자와 중풍병자가 추가되죠. 이 사람들은 각각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서로 연결이 됩니다. 바깥쪽에 있는 이 사람들은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요?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안쪽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고침을 못 받은 사람들이겠죠. 실제로 15절에 나오는 수많은 무리는 고침을 못 받았어요. 예수님이 안 고쳐주고 기도하러 가버리셨어요.
여러분, 고침을 못 받았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 거부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거부의 핵심은 바로 병 고침이에요.
수많은 무리의 병 고침을 거부하신 예수님이 17절에서 다시 한번 병 고침을 거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17절 끝에 보면, 이런 말이 덧붙어 있어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뜬금없이 이 말이 뒤에 왜 붙었을까요? 다시 한번 병 고침을 거부하기 위하여, 이 말을 덧붙인 거예요.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셔요. 그렇지만,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독자가 이것을 모르고, 딱 17절까지만 봤을 때는 혹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 중에 고침 받을 자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있는 자리에 병 고치는 능력이 같이 있으니까, 당연히 이 사람들에게 능력이 사용되려나보다, 하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18절에서 곧바로 그것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병 고침을 받을 자를 따로 등장시켜요. 자, 1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아멘.
한 중풍병자가 갑자기 등장해요. 이 장면을 우리가 개역개정으로 보면, 극적인 묘사가 떨어지는데요. 헬라어 원문에 보면 “카이 이두” 라는 말이 맨앞에 들어갑니다. “카이 이두” 이 말은 “그런데 보라!” 이런 말이에요. 감탄삽니다.
17절에서 독자들은 혹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병 고침을 받을 사람들인가, 하고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18절에서 곧바로 외치는 거예요. “그런데 보라!” 병 고침을 받을 자는 저들이 아니라 바로 이 중풍병자다! 라고 극적인 연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게로 향했던 시선이 중풍병자에게 확 쏠리면서, 병을 고치는 능력이 바로 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게 돼요. 아, 이 사람이 고침받게 되겠구나. 기대하면서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중풍병자예요. 현대의학에서는 중풍병을 뇌혈관 장애로 인해서 일어나는 질환을 말하는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중풍병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을 가리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몸이 마비되고,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해요. 그런 사람을 중풍병자라고 성경에서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그 정도가 굉장히 심해서, 스스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침상째로 메고 왔어요. 마가복음에 의하면 네 사람이 메고 왔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의 제목이 “장벽을 넘어 자유함으로” 인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장벽이 있어요. 오늘 두 가지의 장벽이 나오는데요. 먼저 첫번째 장벽입니다. 1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아멘.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첫번째 장벽, 그게 뭐예요? 바로 사람들이죠.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에요.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자기 몸뚱이로 길을 막고 있어요. 아, 좀 비켜주지. 사람들이 침상을 메고 오는 것을 봤을 텐데도, 꿈쩍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일반 백성들도 많이 있었겠죠. 그래도 어쨌거나 가장 안쪽에는 바리새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겠습니까? 좀 비켜주면 될 것을, 안 비켜줘요.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때, 사람이 가로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가려고 하면, 못 가게 잡는 경우도 있겠죠. 그런데 대부분은 어떤 경우냐면, 사람 때문에 교회에 가기가 싫어지는 거예요.
세계적인 설문조사기관의 연구발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에 1위가 뭘까요?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1위.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위선과 이중적 태도입니다. 교회에서는 정말 착하고 정직한데, 교회 밖에서는 다르다는 거예요. 예배 드릴 때는 정말 아름답게 찬양하는데, 세상에서는 거짓말을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람의 장벽입니다. 사람 때문에 교회를 신뢰하지 못해요.
그래서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간디 아시죠? 인도의 해방운동가 간디.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게 산다는 거예요. 돈을 사랑하고, 약자들을 핍박하고, 거짓을 말하고.. 너무나 다르다는 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을 그리스도인들이 가로막고 있어요. 분명히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우리가 그 길에 앉아서 남들이 오지 못하게 막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돼요. 우리는 이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 또 그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예수 믿지 않겠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나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행히 중풍병자는 장벽을 넘어갔습니다. 중풍병자 혼자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넘어갔어요. 우리가 이 역할을 해야 되는 거죠.
자, 그런데 넘어서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지붕에 올라갔어요. 그리고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예수님 앞에 내려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바로 여기까지가 첫번째 단락, 중풍병자와 만난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번째 단락, “죄 용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0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병을 안 고쳐주시고, 죄를 사해주셨어요. 죄 사함은 곧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서 영혼이 속박되어 있는 것을, 예수님이 자유롭헤 해방해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누구의 믿음을 보셨는가 하면, 그들의 믿음을 보셨어요. 그들의 믿음. 여기서 그들이 누굴까요? 네 명의 친구와 중풍병자. 총 다섯 명이죠. 이 다섯 명의 믿음을 보셨어요. 만약에 중풍병자를 빼고 네 명의 믿음만 보셨다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여러분, 구원은 개인적인 거예요. 내가 믿어야 내가 구원 받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는 내가 구원받을 수 없어요.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예요. 중풍병자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죄 사함을 받지 못했어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20절부터는 친구들이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를 지붕으로 달아 내리고 나서, 이야기에서 사라져요. 나중에 중풍병자가 고침 받고 돌아갈 때도, 혼자서 돌아갑니다. 친구들은 어디 가고 없어요.
우리 구원이 이와 같은 거예요. 누군가를 예수님 앞에까지 데려가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그 사람에게 달린 문젭니다. 우리가 더이상 관여할 수 없어요. 우리가 말을 시냇가로 데려갈 수는 있겠지만, 말이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 역할은 시냇가로 데려가는 것까집니다.
친구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갔으면, 이제 그들의 역할은 끝난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에서 사라진 겁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든 못 받든, 이제는 중풍병자에게 달린 겁니다.
다행히 중풍병자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가 비록 중풍병으로 인하여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지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도 않고, 묵묵하게 믿음을 지킨 겁니다. 그래서 그가 죄 사함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때 가만히 앉아 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다시 등장을 하죠. 21절에 보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여기서 서기관은 율법교사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성경에 율법교사로도 나오고 서기관으로도 나오는데, 같은 사람들이라고 보시면 돼요. 어쨌거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생각했어요.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여러분, 그런데 속으로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속으로 좀 안 좋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말한 것도 아니고 생각도 못 합니까? 이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자가 누구길래 신성모독을 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것이 잘못된 생각도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정말로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여긴 겁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침범한 것이죠. 감히 사람이 하나님의 영역에 손을 댄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속으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는 두번째 장벽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장벽.
첫번째 장벽이 사람의 장벽이었죠. 이것은 곧 타인이 만든 장벽이에요. 반면에 두번째 장벽은 본인 스스로 만든 장벽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거예요. 내가 가진 생각, 지식, 편견, 자존심, 욕망. 이러한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장벽이 되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고, 신성모독하는 자로 본 거예요.
예수님은 이 장벽을 허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각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고 즉시 들춰내십니다. 밑에 22절 봐 볼까요?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몰라서 물어보신 게 아니죠. 그 생각을 아시고 물어보신 거예요.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지금 예수님이 물어보시는 게 아니에요. 대답을 하신 겁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질문했거든요.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속으로 질문한 말에 예수님이 대답하신 겁니다. 그 대답하시는 말을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23절에, 예수님이 또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23절 같이 읽어볼까요? 23절 시작,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아멘.
여러분,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이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당연히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아무나 붙잡고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겠어요.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쉽지 않아요. 지금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데, 이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을 때, 안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만약에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일반 사람이 아니죠.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일 겁니다. 중풍병자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돼요.
예수님이 지금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합니다. 만약에 증명에 성공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권한이 있는 사람임이 증명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죄 사함의 권한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24절에, 예수님이 증명을 시작하셔요. 24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아멘.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증명을 시작하시는데요. 중풍병자에게 누구도 하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하셔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만약에 중풍병자가 안 일어나면, 난감하죠. 당장에 웃음거리가 되고, 소문이 다 퍼져서 앞으로 모든 사역이 막히고 말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리낌이 없으셔요. 자신있게 선포하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밑에 25절에 보니까,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아멘.
여기서부터 세번째 단락이에요. 중풍병자와 헤어지는 이야기.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마자 일어났어요. 그리고 자기 침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갔습니다.
분명히 올 때는 침상에 누워서 왔거든요. 친구들이 침상을 메고 왔어요. 그런데 돌아갈 때는 친구들은 다 어디 가버리고, 혼자서 자기 침상을 들고 갑니다. 이제는 더이상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 없죠. 당당히 자기 삶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게 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됐어요.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중풍병이 나은 이야기를 간증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삶을 살게 된 겁니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얻게 됐을 수 있어요.
그것을 밑에 26절을 토대로 추측할 수가 있죠.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아멘.
중풍병자가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이처럼 한 사람의 변화된 모습이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결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나 때문에 누군가가 교회에 신뢰를 잃어버리고, 영영 믿음 밖에서 산다면, 그것보다 악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누가복음 17장 2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아멘.
나 때문에 누군가가 실족하게 되면, 그 죄가 너무 커요.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정도로, 징벌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말 조심, 행동 조심, 범사에 조심해서 누군가에게 장벽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안에 스스로 장벽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이미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특히 잘 생겨나는 장벽이에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자기 안에 장벽을 만들고, 예수님을 왜곡해서 바라봤죠.
마찬가지로, 내가 속으로 이미 예수님에 대해 상상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상상과 달라서 실망을 하게 돼요. 내가 예수님 만나면 복을 받고, 범사에 잘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고난이 오고, 하는 일마다 안 돼버리면, 낙심하여 떠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믿는 사람이 더 그러더라는 거예요. 신앙생활 잘 하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은혜가 떨어지고, 마음에 섭섭이가 들어오면, 떠나버려요. 이게 왜 그런 겁니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장벽을 만든 것이죠. 내가 스스로 만든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 마음에 장벽이 있는 분이 계시거든 다 허물어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가 굉장히 중요해요. 평소에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입으로 나오고, 행동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가 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잘 다스려서, 생각에서부터 그리스도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적인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오늘 말씀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오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벽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돌아보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착한 행실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 스스로가 교만하지 말고, 생각부터 선한 생각으로 살아가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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