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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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5:1-11
“예수를 따르니라”
2024. 9. 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예수를 따르니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몬 베드로를 만나 시몬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시고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심으로 시몬과 또 그와 함께 한 이들이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내용이에요.
오늘 본문에 앞서 시몬은 이미 한번 등장을 했었죠.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시몬의 집에 방문을 하셨어요. 이때 시몬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고, 그냥 이름만 언급이 됐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다, 그냥 이 정도로만 시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시몬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그의 삶이 변화되는지를 살펴볼 텐데요. 이를 통하여서 우리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무리가 몰려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같이 읽어볼까요? 1절 시작,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자, 무리가 몰려왔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온 거죠. 무리가 몰려올 만큼, 예수님의 인기가 많아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회당을 다니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요.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와서 말씀을 듣는 팬클럽이 생긴 겁니다.
이 팬클럽이 오늘은 게네사렛 호숫가로 찾아왔어요. 여기서 게네사렛은 성읍의 이름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작은 호숫가 마을인데, 게네사렛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가버나움이 나와요. 그리고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막달라가 있습니다. 가버나움과 막달라 사이에 게네사렛이 있는 거죠. 오늘 말씀의 배경이 바로 여깁니다. 게네사렛 동네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신 거예요.
그런데 이 호숫가에 배가 두 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이 두 배 중에 하나에 올라타셨는데, 공교롭게도 그 배가 시몬의 배였습니다. 오늘 본문 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아멘.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이름이 이렇게 등장을 해요. “시몬의 배” 저번에 시몬의 이름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런 식으로 등장을 했었죠. “시몬의 집”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었어요. 그때 예수님의 목적은 시몬의 장모를 치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올라가셨어요. 그러면 이때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왜 시몬의 배에 올라가셨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이 무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배에 올라가셨죠. 호숫가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배를 강대상으로 삼은 거예요. 호숫가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예수님은 배에서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하셔요. 그러면 실제로 목소리가 잘 들린다고 합니다. 공기의 온도와 밀도와 소리의 굴절에 의해서, 제가 문과라서 정확한 원리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바닷가에서 말을 하면 잘 들린다고 그래요.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종종 배에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절에 보면, 이때도 예수님이 배에서 가르치셨어요. 마태복음 13장 2절에 보니까,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님이 배에서 가르치셨고, 무리는 해변에 서 있죠. 이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목소리를 전달하시기 위해서 종종 배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배를 사용하신 거죠.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그 이면에 또다른 진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신 진정한 이유. 그것은 바로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이면,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오셨을 때, 시몬의 배가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었을까요? 시몬의 집은 게네사렛이 아니라 가버나움입니다. 그러면 가버나움에 배를 대야 되는데, 게네사렛에 배를 댔어요. 아마도 밤새 고기를 잡느라 여기저기 포인트를 옮겨다니다가 게네사렛까지 온 거겠죠. 그리고 가버나움까지 돌아갈 기력이 없어서 그냥 여기다가 배를 정박하고 내친김에 여기서 그물을 씻고 있었을 겁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시몬이 이 날 아침에 만나도록 정교하게 계획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필이면 이날 시몬이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 역시도,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만약에 시몬의 배가 고기로 가득했다면, 예수님이 그 배에 오르실 수 없었겠죠.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 배에 오르신 겁니다. 이 역시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때로는 시몬의 배처럼 아무런 수확도 없이 텅 비어버린 날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일이 풀리지가 않고, 손해만 보고, 마음이 상하는 날이 와요. 그런데 여러분, 그 날이야말로 어쩌면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는 날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가득한 나의 생각과 세상적인 욕심을 다 비워내고, 아무 것도 없을 때, 주님이 그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를 고치기 위해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면, 이번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시몬을 위해서 시몬의 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시몬에게 목적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호숫가에 몰려와 있는 무리는 어느샌가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팬클럽은 그냥 팬클럽일 뿐이에요. 말씀이 끝나면 사라져요.
그래서 4절부터는 아예 무리가 등장하지 않아요. 오직 시몬에게만 초점이 맞춰집니다. 4절 말씀 같이 봐볼까요? 4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멘.
말씀을 마치시지마자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시몬에게 말씀하시죠. 자기를 따라서 호숫가까지 몰려온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안중에 없어요.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시몬만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호숫가에 있는 무리를 향해서 선포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모든 말씀이 시몬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동안에, 시몬도 그 배에 같이 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배를 조종하실 수 없기 때문에, 시몬이 배를 조종하고 있었어요. 밤새 그물을 던지느라 피곤하지만, 말씀이 잘 끝마칠 때까지,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배를 통제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이때 시몬의 배는 고기 잡는 배가 아니라,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의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배의 사명이 바뀐 겁니다. 그리고 말씀이 끝난 뒤에 다시 또 사명이 바꼈어요. 강단의 사명에서 고기잡이 배의 사명으로.
시몬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시몬은 어부였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마도 평생, 죽을 때까지 어부로 살려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처음에는 요단강에서 형제 안드레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시몬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어요. 그리고 두번째는 시몬의 집에 찾아오셔서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세번쨉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올라오셨어요. 그리고 그 좁은 공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시몬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팬클럽은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정작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고기 잡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어부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찾아간다고 해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야만,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든, 함께하고 싶지 않든, 상관 없이, 예수님은 찾을 자를 찾으시고, 만날 자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만나주시는 그때에, 우리는 본래의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난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났을 때, 배가 다시 고기잡는 배로 돌아간 것처럼, 시몬이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는 성도로 있다가 다시 어부로 돌아간 것처럼,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성도예요. 그런데 예배가 끝나면 더이상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는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동일하게 성도여야 합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진정으로 성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나,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나, 언제나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동일하게 거룩함을 지키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났을 때,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시몬을 어부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은 이미 고기잡는 일이 끝나고, 그물을 씻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물을 씻는다는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오늘은 더이상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씻어서 정리해놓고, 내일 다시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시몬은 오늘은 더이상 어부가 될 일이 없다는 거예요. 집에 가서 쉬다가 저녁이 되면, 그때서야 다시 어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다시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 다시 어부가 되어서 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여러분, 이 말이 시몬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미 그물까지 다 씻어놨는데, 다시 던지라는 거예요. 더군다나 지금은 이미 날이 밝은 아침입니다. 갈릴리에서는 날이 밝을 때 고기를 잡지 않아요. 왜냐하면, 날이 밝을 때는 그물이 물고기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때 당시에 그물을 린넨으로 만들었는데, 린넨은 광택이 있어서 날이 밝을 때는 물고기 눈에 잘 보여요.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그물을 다 피해버립니다. 그래서 밤에만 그물을 던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환한 아침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상식적으로 들리죠. 지금은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다 피해버리는데, 뭘 알지도 못하면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냐? 이런 마음이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그물을 던지는 것은 누가 봐도 바보같은 짓이에요. 뭐, 눈이 안 보이는 물고기가 있으면 잡힐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물고기가 얼마나 되겠어요. 지금 몸도 피곤하고, 잠도 오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말씀 끝날때까지 기다려줬으면 됐지, 무슨 그물까지 던지라고 하나,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몬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이죠.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아멘.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기로 결단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장면은 시몬이 어부로서 순종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순종한 겁니다.
만약에 시몬이 여전히 어부로서 자신의 경험과 상식을 토대로 생각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몬은 어부 시몬이 아니에요. 제자 시몬입니다. 예수님이 그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내 경험, 내 상식 다 버리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안 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말씀에 의지하여서 순종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할렐루야.
시몬이 말씀에 의지하여서 그물을 던졌을 때, 그의 그물을 던지는 방식과 그의 기술과 그의 노하우는 분명히 과거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몬은 분명히 과거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에게는 이제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제자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예수님만 따라다닌다고 제자가 아니에요. 게네사렛 호숫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왔지만, 그들 중에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따라다니는 팬클럽이었어요.
제자는 단순히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야말로 제자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몬은 이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허무맹랑한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조롱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순종하는 어엿한 제자였어요. 그가 순종했을 때,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몬이 평생 고기를 잡으면서 살았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에는 그물을 던져본 적이 없으니까, 처음일 수밖에 없죠. 아침에, 이토록이나 많은 고기가 잡힌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에요. 그러나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 놀라운 기적 앞에서, 시몬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어부가 될 것인가. 시몬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맞아요. 하지만 아직 제자로서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상탭니다. 지금은 제자로서의 정체성과 어부로서의 정체성이 공존하고 있는 상탭니다. 제자이면서 어부, 어부이면서 제자.
요한복음을 보면, 안드레와 요한이 그런 상태였어요. 세례 요한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어부로 사는, 두집 살림을 하는 상탭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나오고, 또 본문에 이름은 안 나오지만 분명히 안드레도 같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에요. 한 쪽에 올인을 해야 됩니다. 어부로 살든지, 아니면 제자로 살든지.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돼요. 한쪽에 올인하라는 말이, 직장도 다 때려치고, 교회 일에만 전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정체성을 지키라는 말이에요. 예배 드릴 때만 성도가 아니라,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성도로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직장에서는 일하는 사람으로, 회식자리에서는 술 마시는 사람으로, 운전대에서는 신호위반하는 사람으로, 가면을 바꿔끼듯이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나, 회식자리에서나 운전대에서나, 그 어느 곳에서든지 동일하게 크리스챤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고, 선을 베풀며, 말씀에 어긋나는 일은 단호하게 쳐낼 수 있는, 담대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몬에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제자로서 살 것인가, 아니면 어부로도 살고 제자로도 사는 이중생활을 할 것인가?
시몬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청을 해요. 8절에 보니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시몬은 예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가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시몬의 이 반응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반응과는 많이 다릅니다. 나사렛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했죠. 가버나움에서는요, 떠나시지 못하게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밀쳐내고, 한쪽에서는 붙잡아요.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입니다.
그런데 시몬의 반응은 다르죠. 시몬은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못해요. 전적으로 예수님의 선택에 맡깁니다. 내가 예수님을 밀쳐내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예수님 스스로 떠나가실 것을 요청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예수님을 붙잡고 싶어요. 예수님이 장모님을 치유하시는 것을 봤고, 또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히게 하시는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이분을 따르고 싶어요. 하지만 나같은 죄인이 그 자격이 되리라고 감히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나처럼 배운 것도 없고, 성격도 안 좋고, 우유부단하고, 겁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대단한 분을 따를 수가 있을까? 하고 자기 스스로 체념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자가 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합니까? 제자가 되는데 대학교 졸업장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재산이 많다든지, 성품이 좋아야 한다든지, 그런 제한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제자는 남녀노소,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자유인이든, 종이든,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몬 역시도 제자가 될 수 있어요. 아니, 이미 시몬은 제잡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내가 제자가 맞나? 내가 거듭난 것이 맞나? 내가 구원 받은 것이 맞나?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의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몇 월 며칠에 구원 받았지? 내가 여전히 이 모양으로 사는데, 내가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자격이 있을까? 계속해서 의심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얻었고, 믿는 자는 이미 깨끗하여 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10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아멘.
이미 목욕한 자, 이미 믿는 자는 깨끗해졌어요. 다만 여전히 그 안에 죄성이 있고, 욕심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 더러움을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 뒤에는 너희가 서로를 씻어주라고 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미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여전히 내 삶이 변화되지 않고, 남 보기에 부끄러운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죽어지지 않은 나의 더러움이 나를 그렇게 살게 만드는 것이지, 내가 구원을 못 받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내가 더럽다면, 지금이라도 그 더러움을 씻어내면 됩니다. 제자들의 발이 여전히 더러웠듯이, 그래서 그 발을 씻어냈듯이, 우리들도 우리의 더러움을 얼마든지 씻어낼 수 있어요. 오늘 다 씻지 못하면, 내일, 내일 다 씻지 못하면 모레. 우리가 날마다 조금씩 씻어나가야 합니다.
시몬이 자기 배 위에서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 더러움이 너무나도 커서 감히 주님을 따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더러움보다, 시몬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더 컸기 때문에, 주님은 시몬에게 무서워 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은 시몬의 과거에 대해서 일절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네가 얼마나 더러운 삶을 살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책망하지 않으셔요.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시몬의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시몬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해요.
예수님은 시몬이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취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조그레오” 라는 말인데, 이 말은 “생포하다, 사로잡다” 이런 뜻입니다.
시몬이 이제까지는 물고기를 사로잡는 어부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사로잡는 어부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겁니다.
앞으로도 시몬은 어부로서 살게 돼요. 하지만 이전까지는 그물을 던지는 어부였다면, 이제는 그물이 아니라 복음을 던지는 어부로 사는 겁니다. 그의 직업은 여전히 어부이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정체성이 바뀐 겁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는 그래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4장 19절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시몬의 직업이 여전히 어부라는 겁니다. 다만, 그가 더이상 물고기를 낚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낚아요. 그의 직업은 여전히 어부인데, 그의 목적은 물고기아 아니라 사람에게 있어요. 그가 더이상 세상 가운데서 자기 욕망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 가운데 있을지라도 거기서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의 본질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생활이 있고, 나의 직업이 있고, 나의 가정이 있어요. 그렇지만, 나의 내면은 더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에요.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나로서 사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가서 보면,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죠. 11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아멘.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그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배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는 말씀 앞에서 돌아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본받을 만한 결단입니다. 세상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재산을 다 바치고,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얼마나 대단한 헌신입니까? 우리가 감히 따라할 수가 없는 너무나도 숭고한 결단이죠.
그러나 여러분,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꼭 그렇게 인생 전체를 바쳐서 헌신해야만 제자가 아닙니다. 시몬이 모든 것을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내팽개치고 나몰라라 했던 것은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9장 5절에 보면, 시몬에게 아내가 있었고, 여전히 그 아내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9장 5절 봐 볼까요?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본래 사도들에게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다는 것이죠. 다른 사도들도 그렇고 특히 게바도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는 거예요. 다만, 나는 선교사역 때문에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서 아내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것뿐이지, 나에게도 본래는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제자가 된다고 해서 꼭 가정을 다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시몬 베드로도 아내가 있는데, 우리라고 해서 아내를 버릴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지만, 그가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는 제자였어요. 그가 자신의 경험과 상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미 제자가 된 겁니다.
그가 이후에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내가 앞으로는 제자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지, 그것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릴 때나 교회 모임에 참석할 때에만, 마치 예수님께 잠시 나의 배를 강단으로 내어드린 것처럼 일시적으로만 성도의 모습으로 있고, 그 시간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버리는, 그런 계약직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버리고. 나의 배에 예수님이 타고 계실 때뿐 아니라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순간에, 내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 어느곳에서든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