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4:1-5 그리스도인의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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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장 1-5절
고린도전서 4장에 이르러 주제가 분쟁에서 충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고린도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충성이라는 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오랫동안 지속된 분쟁 가운데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영적 피로감이 그들 가운데 밀려왔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충성” 이라는 주제를 끄집어냅니다. 지금 당장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충성하는 것은 다짐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충성하고 싶어도 건강이나 환경이 따라 주지 않으면 충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끝까지 충성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길이 쉽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헬라어로 ‘일꾼’을 ‘훼페레테스’ 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1세기 당시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키던 단어입니다. 그들은 선장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존재로, 왜 노를 저어야 하는지, 노동의 보상이 무엇인지 물을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작전에 투입되는 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전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모를지라도 그들은 상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여기서 가장 강조해야 하는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흔히 “충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맡은 자”에 있습니다. 충성은 곧 하나님께서 맡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충성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은 두 번씩이나 성령이 막으심에도 불구하고, 계속 북아시아 전도 여행을 감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북아시아로 건너가기 전날 밤, 바울은 마게도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영어 성경에는 비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광경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말로 해도 듣지 않으니,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광경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 청하여, “우리를 도와 달라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려고 하던 북아시아를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다른 사람을 예비 하셨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감독이 대본을 따라 배우에게 각기 다른 배역을 맡기듯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우리에게 각기 다른 배역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명령 앞에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배역에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재차 “판단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곧 우열을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된 일꾼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칭찬을 받든 욕을 먹든 신경쓰지 않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왜 우리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까? 주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심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자는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초림 예수는 구원자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심판자로 오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심판하는 것은 월권하는 것이고 이에 따른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심판과 인간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신다고 말합니까? 어둠에 감추인 것과 마음의 뜻을 나타내심으로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므로 은밀하게 범하는 악행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선행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좋다고 평가를 받던 자들 중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핍박을 받고 무시당하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왜,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또한 훗날 어떤 보상이 있을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충성스럽게 맡은 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충성은 헬라어 “피스토스” 라는 단어인데, 그 어근이 “피스티오” 믿음 이라는 단어입니다. “신뢰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슨 이야기 입니까? 충성은 믿고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떠한 분이시고, 어떻게 인도하실 지를 분명히 알 때, 가능한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언제 힘이 생깁니까? 일꾼의 에너지는 자신에게 일을 맡긴 주인의 성품을 신뢰할 때 힘이 생깁니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 어떠한 분이신지 알면 때로는 욕을 먹고, 험한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맡겨진 일에 충성되이 감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곳에 하나님의 칭찬이 있습니다.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지칭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모든 분쟁, 문제의 시작이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십자가에 나아갈 때, 나의 삶이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한없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교만을 뽑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절망스러운 모습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며 맡겨진 우리의 사명을 위해 끝까지 충성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