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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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5:12-16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2024. 9. 25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담은 단락인데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면서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던 중에, 특별히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오늘 본문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내용면에서 조금씩 차이점이 있는데요. 첫번째 차이점은 나병환자를 만난 시간적인 배경입니다. 언제 만나셨는가?
마태복음은 산상수훈 뒤에 만나신 것으로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끝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나병환자를 만나셨어요.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갈릴리 여러 회당을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시던 중에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뒤에 만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죠. 이중에 어떤 순서가 맞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마가복음의 순서가 맞는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의 시간연대가 가장 바른 순서대로 쓰여진 것으로 인정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가복음의 연대를 따라서, 예수님이 갈릴리 여러 회당을 다니시면서 병자들을 고치시던 중에, 나병환자를 만난 것으로 보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는 이 순서를 따르지 않고, 제자들을 부르신 직후에 만난 것으로 기록했어요.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사역의 방향을 가야 하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섭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 제자들을 부르신 직후에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제자의 본질을 깨우쳐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시몬을 부르시면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을 취해야 하는가? 바로 나병환자와 같은,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누가는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 뒤에 곧바로 나병환자를 만나신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나신 것처럼, 제자들도 나병환자와 같은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우리들 역시도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주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겠는데요. 오늘 본문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2절 시작,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아멘.
오늘 말씀의 배경을 먼저 봐 볼까요? 오늘 말씀의 배경이 “한 동네”라고 소개되고 있는데요. 다른 복음서에는 이 배경이 안 나옵니다. 어디서 나병환자를 만났는지 안 나와요. 누가복음만 유일하게 “한 동네”라고 하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어요. 이것이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들의 두번째 차이점입니다. 공간적인 배경을 누가복음만 기록했어요.
그런데 이 동네가 이름이 없죠. 누가는 굳이 동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요. 그저 예수님과 나병환자가 만난 장소가 동네라는 것만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누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동네인가가 아니에요. 그 동네가 무슨 동네든지 간에 어쨌거나 동네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동네가 나병환자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병환자는 동네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레위기 13장 46절을 보면, 나병환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병환자가 동네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긴 겁니다. 만약에 이 일이 발각된다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병환자 입장에서는 동네에 들어가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나병환자는 목숨을 건 거예요. 왜 목숨을 걸었을까요? 동네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고침을 받기 위해서 목숨을 건 겁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나병환자로 살다가 죽으나,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으나 별 차이가 없다고 여겼을 거예요. 이미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한 것이죠.
이 사람은 정상적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단지 “한 나병환자”라고만 소개를 하지만, 특별히 누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 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어요. 이것은 그가 절대로 회복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이 사람의 몸 상태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쓸 수 있었을 겁니다. 그가 진단해볼 때, 이 사람은 가망이 없는 사람이에요.
온 몸에 나병이 들렸다는 말을 헬라어 원문에 맞게 직역을 하면, “나병으로 충만하다”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나병으로 충만한 사람이에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병으로 가득 찬 사람. 이런 사람이 과연 치유가 되겠습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다보니까 삶에 희망이라는 것이 없죠. 시몬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버렸지만, 이 나병환자는요, 강제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요. 가족, 집, 재산, 인간관계,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에게 딱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생명이죠. 그는 이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동네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 12절을 다시 봐 볼까요?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아멘.
12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데요. 이 모습은 시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죠. 시몬도 배 위에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거든요. 예수님 앞에서 시몬과 나병환자의 반응이 똑같아요. 그리고 주님께 처음 하는 말도 똑같습니다. “주여”
시몬도 그렇고 나병환자도 그렇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주여” 라고 말했어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죠.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자, 그러면서 “주여” 뒤에 시몬은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어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감히 내가 예수님을 따라도 될지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나를 떠나주시라고 구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실지 선택을 주님께 맡긴 거예요.
나병환자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나병환자가 뭐라고 구했습니까?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가 지금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거든요. 그러면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담대하게 나를 고쳐달라고 구해나 봐야되지 않겠습니까? 한번 질러는 봐야죠. 그런데 자기를 고쳐달라고 구하지 않아요. 대신 다른 걸 구했죠. 그가 뭘 구했습니까?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는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알 수가 있어요. 하나는 그가 굉장히 겸손했다는 겁니다. 그는 함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소원을 구하지 않아요. 시몬의 경우와 같이 선택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나를 고쳐주소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이었어요. 그리고 이 말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요. 그것은 그에게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 그게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고쳐달라고 확실하게 구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가 이처럼 예수님께 고침받기를 구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의심했다면 목숨 걸고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그가 구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과연 나를 고쳐주실 마음이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부정하다고 미워하고 피하는데, 예수님도 나를 피하시면 어떻게 하나? 예수님 앞에까지 오긴 왔는데, 감히 나를 고쳐달라고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갈릴리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시면서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셨지만, 그 중에 나병환자는 없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나병환자는 사람들 있는 곳에 올 수가 없으니까, 다른 병자는 다 만나도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만나신 일이 없어요. 최초로 지금 나병환자를 만나신 겁니다.
과연, 예수님은 나병환자도 고쳐주실까? 내가 예수님을 만나긴 만났는데, 나를 고쳐주실 마음이 있으실까?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감히 나를 고쳐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엎드려서 모든 처분을 주님께 맡긴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나병환자의 말을 다시 보면, “주여 원하시면” 이라고 했죠. 여기서 “원하시면” 이라는 말이 헬라어 문법에서 “제3 조건절”에 해당하는 말이에요. 조건절은 말 그대로,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만약에 뭐 하면, 뭐 하리라. 주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시리라. 이것이 조건절인데, 나병환자가 말한 조건절은 “제3 조건절”입니다.
헬라어 조건절에는 “제1 조건절”부터 “제4 조건절”까지 있어요. 지금이 헬라어 수업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이 중에 제3 조건절만 설명을 하자면, 이것은 실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낮은 경우에 쓰는 용법입니다.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운 거죠. 조건이 충족만 되면 결과가 실현이 될 텐데, 조건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낮아요. 이런 경우에 쓰는 어법이 “제3 조건절”입니다.
성경에 이 조건절 문장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7장 20절이 있어요. 마태복음 17장 20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아멘.
여기서 조건이 뭡니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을 갖는 거죠.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을 갖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지금 나병환자가 하는 말도 이런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내가 깨끗해질 수 있는데, 주님이 이것을 원하실 가능성이 낮다는 겁니다. 그래서 확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나병환자의 이 말을 보고 섣부르게 이 사람을 믿음 없는 자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애초에 믿음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이 사람은 목숨을 걸고 왔어요. 비록 이 사람에게 확신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실낱같은 가능성에 자기 목숨을 건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100퍼센트 확신 갖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지금 기도하면 즉시 병이 나으리라. 내가 구하기만 하면 내 가족이 즉시 예수를 믿으리라.’ 이렇게 100프로 확신하는 분 계십니까?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거의 드물단 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구하면 받으리라는 신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확신을 못해요. 하물며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듣고 찾아온 나병환자가 어떻게 확신을 하겠습니까. 확신을 못하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정말로 놀랍게도, 이 사람은 확신이 없으면서도,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처럼, 그는 정말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을 가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가 이 믿음으로 산을 옮기지는 못할지라도, 그가 진정으로 구원을 얻는 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구원을 얻었어요. 오늘 본문 13절을 봐 볼까요? 그에게 어떤 구원이 임하였는지,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아멘.
자, 여러분. 나병환자에게 구원이 임하였는데요. 이 장면에서 우리가 첫번째로 놀라게 되는 장면은 예수께서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손을 대서는 안 돼요. 부정하기 때문에. 레위기 13장 45절에 보면, 나병환자는 자기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내가 나병환자인지 모르고 접근을 하면, 내가 나병환자라는 신호를 내라는 거예요. “부정하다 부정하다, 나 나병환자니까 오지 마시오.” 이렇게 자기 정체를 드러내라는 것이죠.
율법이 이 정도로 가혹하게 나병환자들을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절대로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금단을 깨고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먼저 율법을 어기고 동네로 들어온 나병환자에게, 예수님 자신도 율법을 어기시면서 행동하신 것이죠.
만약에 유대인이 지금 이 장면을 봤다면, 당장에 경찰에 신고했을 일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이 지켜지지 않는 그 상황에 동참하십니다. 나병환자를 책망하시기는커녕 같이 율법을 어기셔요. 왜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하셨는가?
마가복음 1장 41절에 보면, 특별히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순간에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예수님의 안중에 없는 거예요. 오직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하셨습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에는 이 말을 “Filled with compassion”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 말은 “연민으로 가득차다” 라는 말이에요. 나병환자가 나병으로 충만했다면, 지금 예수님은 연민으로 충만해요. 이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하셨어요.
그래서 율법이고 뭐고, 이 사람을 위로하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죠. 그리고 그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은 명령이에요. 예수님은 그가 깨끗해지기를 명령하셨습니다. 나병환자가 마음으로 원하면서도 차마 구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 예수님이 마음 가득히 원하고 계십니다. 나병환자가 원하는 것 그 이상으로 예수님이 더 원하고 계셔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보다 더 그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6장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할렐루야. 우리가 원하는 소원, 우리가 받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우리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원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그것을 받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어요.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가 깨끗함을 소원하였고, 그 소원대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 반면에, 고침 받기를 원하였으나 받지 못한 사람들도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5절 16절인데요.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그러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수많은 무리가 고침을 받기 위해서 모여 왔습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는 “그러나” 라는 말이 없는데요. 헬라어 원문상에는 “모여 오되” 뒤에 “그러나” 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수많은 무리가 모여 오되, “그러나” 예수는 물러가셨다는 거예요.
중풍병자는 고쳐주셨으면서, 다른 병자들은 안 고쳐주고, 그냥 물러가신 겁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마음이죠. 고쳐주시든 안 고쳐주시든 예수님 마음이에요.
예수님은 중풍병자는 고쳐주시기를 원하셨어요. 하지만 수많은 무리는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바라보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무리를 바라보실 때는 그렇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달랐을까요? 그 답이 나병환자의 말과 행동에 들어있습니다. 아까 제가 나병환자의 말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고 했죠? 하나는 뭡니까? 바로 겸손이죠.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어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그분 앞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모든 처분을 주님께 맡겨드렸습니다. ‘나같은 부정한 자가 감히 예수님 가까이 온 것만으로도 죄송한데, 어떻게 염치없이 나를 고쳐달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차마 말할 수가 없어요.
주여,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주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와도 같은 고백이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오늘날에 우리들은 어떨까요? 우리는 보면, 대부분 기도할 때, 나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합니다. 나의 원대로 하옵소서. 병이 고침받게 하시고, 사업이 잘 풀리게 하시고, 자녀가 잘되게 하시고, 뭐가 됐든지 간에 내가 원하는대로 주시옵소서. 저만 해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아요. 저희 딸이 이제 머리가 커가지고, 뭘 해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저녁에 딸을 목욕시키려고 하면, 목욕을 안 하고, 꼭 다른 걸 하자고 그래요. 요새는 주로 블록 쌓기 놀이를 하자고 하는데요. “아빠, 높이높이.” 블록을 높이 쌓자는 겁니다. 아빠, 높이높이. 그러면 제가 같이 앉아서 놀아줍니다. 그리고 블록을 다 쌓고나면 딸이 무너트려요. 그러면 이제 끝난 거니까, 제가 목욕하러 가자고 일으켜세우죠. 그런데 목욕을 안 하고 또, “아빠, 높이높이” 이 짓을 몇 번을 반복을 해요.
여러분, 우리가 하는 기도가 이와 같은 거예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따로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않고, 자꾸만 엉뚱한 것을 구하는 겁니다. 높이높이, 크게크게, 많이많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엇갈린다는 거예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지 않고,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어요. 딸이 목욕하기를 구하기만 하면, 자기는 손가락 까딱 안 해도 저랑 아내가 머리도 감겨주고 몸도 씻겨주고, 드라이도 해주고, 로션도 발라주고, 풀서비스를 해줄 준비가 됐는데, 안 구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하면, 속에서 천불이 나요. 지금 시간이 늦어서 빨리 목욕하고 자야 되는데, 아빠 마음을 너무 몰라준단 말이죠. 여러분, 딸 하나 가진 저도 그렇게 열이 나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속이 타실까요?
수많은 무리가 몰려왔을 때, 그들 중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도 천불이 나서 물러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구하지,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복이든 혹은 그것이 고난이라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구할 때에 주시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두번째로, 나병환자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끗하여질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감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헛수고가 될 수도 있고, 들켜서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 그 작은 가능성에 생명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이 생명을 거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가망이 없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내가 구하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될 때에, 그것은 우리 인생에 실제가 됩니다. 우리 인생에 역사가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할 것인가? 오늘 두 가지를 기억하셔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고, 그것을 구하는데 생명을 거는 믿음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4절, 시작.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아멘.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를 깨끗하게 하신 후에 그에게 중요한 두 개의명령을 하셨어요. 하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모세가 명한 대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중에 두 번째 명령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모세가 명한 대로”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모세가 명한 대로, 그 율법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율법을 어기고 왔죠. 율법의 선을 넘어서 동네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선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늦어서 신호를 위반할 수도 있고,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의도치 않게 가족들에게 소홀하거나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을 이해못하실 분은 아니에요.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환자가 한번 율법의 선을 넘었지만, 한 번으로 족해요. 앞으로는 그 선을 넘지 않고, 모세가 명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그가 동네 밖에서 외롭게 살았지만, 이제는 그가 동네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게 되었어요. 그러면 마땅히 공동체의 질서를 따라야겠죠.
옛 습성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돼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거룩하고 복된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번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더라도, 그 다음에는 그냥 물러가실 수 있어요. 우리가 한번 은혜 받은 걸로 끝내서 되겠습니까? 주님이 물러가시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하여 주시도록, 우리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때에,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이루어질 것을 구하며, 그 구한 것을 위하여 생명을 거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날마다 더욱 철저히 말씀을 지키며, 앞으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