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1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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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호세아 1장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갈라집니다. 국가가 분열된 이후에 항상 정통성의 문제가 부각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볼 때, 호세아가 남쪽 왕을 먼저 기술했기 때문에 호세아를 남 유다에 속한 선지자일 것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호세아는 북쪽 사람입니다.
북 이스라엘에 속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이 아니라, 네 명이나 되는 남 유다 왕들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입니다. 그 후에 북쪽 왕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왜?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에 속한 선지자이면서 남쪽의 유다 왕들의 이름을 먼저 열거한 것일까요? 이 순서에는 호세아 선지자의 중요한 신학적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몸은 북 이스라엘에 머물고 있지만 정신적 신앙적 소망은 남쪽 유다에 두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사상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메시아가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 특히 다윗의 가계를 통해서 메시아가 나실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일관된 예언과 연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절은 호세아 선지자의 신학 사상을 가늠하게 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당시 호세아가 속한 북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함 2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남쪽은 평안했습니다. 가끔씩 돌발적인 변수가 있어서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어려웠던 적인 있었지만, 대체로 평안한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조카를 죽이고 아버지를 반역하는 혁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극심한 가운데 선한왕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여로보암 2세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들은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부국강병의 기준에서 볼 때,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습니다.
왜? 이러한 태평성대 시대에 호세아 선지자와 같은 아픔과 비련을 가진 선지가를 등장시키신 것일까요?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부국강병과 비련과 고통의 선지자는 표면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1절 앞부분을 다시 보면,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브에리는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이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름 석 자만 달랑 남기고 간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호세아서 외에는 브에리에 대해서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호세아의 가문은 큰 영향력이 없던 가문임을 암시하는 문구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호세아에게 말씀하신다.”는 말의 뜻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호세아라는 도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호세아를 하나님의 나팔로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난해합니다. 호세아는 히브리어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구원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와 호세아는 발음상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가서 취해야 할 아내의 이름은 고멜입니다. 여기서 격론이 벌어집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하신, “음란한 아내”는 매춘을 직업으로 삼은 창녀라는 말입니다. 창녀와의 결혼은 율법으로 금하는 중요한 금령 중 하나입니다. 둘째, 창녀를 아내로 맞아야 하는 사람의 직업이 선지자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의 선지자 활동에 방해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선지자직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호세아에게 몸을 파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정도를 넘어서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내용이 실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예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의 예화 비유라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3절에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라고 말합니다. 음란한 아내의 이름이 고멜인데, 그녀는 디블라임의 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비유였다면, 누구의 딸이라는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디블라임은 당시 널리 사용했던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멜이 외간남자를 좇아 가출했는데, 3장 2절에 가출한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은 열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여기서 호멜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부피 측정 단위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쓰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어쨌든, 선지자 호세아와 창녀 고멜은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습니다. 우선 고멜이라는 이름의 뜻은 “종말, 결말”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맨 마지막 장면에 the end 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바로 그 의미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호세아와 고멜의 사이에서 태어날 첫 아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최초에 누구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까? 창세기 32장을 보면 완악하고 완고한 야곱이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고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 합니다. 야곱이 항복하지 않으니깐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도록 포기하지 않고 천사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자기의 이름을 말하는데,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속이고 다투는 자” 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자기 이름을 순순히 말하는데 그것은 항복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어보셨을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의 회개와 고백을 받으시고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번역하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을 꺾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미 허벅지 관절이 꺾이는 참패를 당했음에도 목숨이 부지되고, 여전히 하나님의 환대와 애정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결국 이긴 것이나 다름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김은 깊은 역설이 배어 있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도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이 이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는 “하나님이 씨를 뿌리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뜻보다는 또 다른 의미로, 장소의 과거와 미래 사건이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은 농사짓기에 그리 좋은 땅은 아니었습니다. 비가 잘 내리지 않는 땅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이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은 비를 관장하는 바알이라는 신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도 점차 애굽에서 구원해내시고 기나긴 광야 기간 동안 인도해주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잊고, 비를 내려주는 ‘바알’ 신을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호세아 선지자가 나타나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8절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관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중북부에 위치한 가장 비옥한 평야지대로서, 그 땅이 비옥한 이유는 하나님이 씨를 뿌렸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무리 비옥한 ‘이스라엘’ 땅이라 해도 그 땅에서 풍성한 농작물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하늘은 땅에, 땅은 ‘이스르엘’에 곡식이 나도록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풍성한 소산물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1-22절
더욱이 호세아는 이 ‘이스르엘’ 땅에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처참한 역사를 상기해내고 있습니다. 이스르엘은 과거 예후와 아합의 집을 대량 학살한 지점으로 바알 제사장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으나, 다윗집에 대한 예후의 공격은 그 도를 넘어섰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예후 왕조의 몰락이 북 왕국의 몰락을 수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후는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바알 종교를 척결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바알을 없앤 예후였지만, 호세아는 그가 이스르엘 땅에서 흘린 피 흘림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이스르엘 땅을 위해서는 모든 살육의 전쟁을 종식하고 죽음의 무기인 활과 칼을 꺾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을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하나님의 절박한 심정과 더불어,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 바로 “이스르엘” 이름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5-6절 “그 날에 내가.... ”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로루하마는 “로”와 “루하마”의 복합어 이빈다. 루하마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로”를 붙여 사용하면, 부정어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신다” 의 뜻이 됩니다. 더 이상은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
8-9절 “고멜이... ”
여기서도 “로”가 붙습니다. “암미” 라는 뜻은 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에 “로”가 붙어, “내 백성이 아니다” 왜 그럴까요? 계약이 파기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계약이 파기 된 것입니까?
출애굽기 6장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를 내 백서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제일 먼저 계약을 제안해 오십니다. 이 계약은 한쪽이 파기하면 파기한 한쪽이 무조건 죽게 되는 계약입니다. 그래서 이 계약을 일방적인 계약이라고 합니다. 다른 계약과는 차원이 다른 계약입니다. 이 계약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창세기 15장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횃불 언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계약의 내용은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쪽,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계약을 파기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어야 합니까? 파기한 쪽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할 백성을 누가 가서 취합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 호세아가 가서 취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계약을 파기하여 더 이상 구제불능인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 아픈 사랑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 호세아의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습니까? 스스로 아파하는 구원자 호세아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사랑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10-11절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 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9절에서는 음행하고 타락하고, 자신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점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관한 하나님의 채찍은 파멸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끔씩 우리에게 곤고한 세월을 주고 어려운 일들을 던져서 가는 길을 힘들게 만들고 주저앉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떠한 경우 가운데 있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전부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나”... 복음을 남겨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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