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0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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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갈라디아서 2:1-10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첫번째 선교 여행 때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교회들을 세웠다. 갈라디아 교회는 한곳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안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 말에 성도들이 동요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도 비하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기에 잘 못된 교리를 가르쳤다 하면서 그의 사도권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가 갈라디아서 이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 한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그의 일생을 예수님을 전하는데 헌신하였다. 여러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하며 살았고, 이렇게 선포하다 죽임을 당했다.
복음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챙취해 낼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만 할례를 받아야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잘못된 교리이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이 주장한 교리가 맞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증명이 되었다고 그러니 율법을 지켜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rj짓 선자지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예루살렘 공의회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받은 율법에 메여 있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인간의 열심 다시말해 율법을 지켜야 조금 구체적으로 할례를 해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주장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바울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해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 자리에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있었고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있었다.
이들이 바울이 하는 사역,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9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7–9 (NKRV)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러기에 신앙 생활속에서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늘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어떤 것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어릴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왜’라고 물어봤는지 아는가? 이안이와 이든이도 얼마나 왜? 라고 묻는지 모르겠다. 뭐만해도 “왜?” 라고 묻는다. 어딜 가도 “왜?” 무엇을 해도 “왜?” 다 궁금한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도 “왜” 가 있어야 한다.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앞에서도 말한 것 같이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오늘날 본질은 잃어버리고 껍데기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에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과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땅에가서 살면 아브라함을 책임져주시는 것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다는 것이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리고 야곱의 때에 애굽으로 건너가 430년을 살게 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애굽의 국무총리인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의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가 된다. 그러니깐 430년의 애굽생활 중 적어도 300년 이상은 노예로 살아갔다.
노예생활이 너무다고 힘들고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신다.
그리고 나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모세를 통해 십계명(율법)을 주신것이다.
첫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건 무슨 말인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무엇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건 말 하지 않아도 아는것 아닌가?
그러면 십계명 중 4번째 계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을 지정하셨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본질은 무엇인가?
애굽에서 노예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쉴 수 있었을까?
출애굽기 2:23–25 (NKRV)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애굽기 3:7(NKRV)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노예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어 그곳을 나오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에게 과연 쉼이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일주일중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는지 아는가? 얼마 되지 않는다. 1998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일주일중 하루의 유급휴일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 휴일이 있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휴일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꺼내자 마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너 이건 무슨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하면서 “너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라” 말그대로 쉬라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쉼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와 함께 쉼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길 원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외에 다른 의미도 있지만 그 안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겉 껍데기만 남아 어떻게 변질이 되었는지 아는가?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 날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킨다. 걸음수도 정해져 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도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경계를 짓고 그 안에서만 물건을 옮길 수 있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일이기에 안식일 전에 식사를 다 준비한다. 노동이 금지 되었기에 전자 기기 사용, 운전도 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 층수도 다 눌려 있다. 버튼을 누르는 것도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예수님시대에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다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노동을 하여 율법을 어겼다고 이야기 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께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였다. 사람의 안식을 위한 날인데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것이 노동이기에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웃지 못하는 일인가? 본질은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할례도 마찬다지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증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식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몸에 지닌 이 표식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스스로 자각하기 위함이다.
할례를 하고 안하고가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 바뀌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헌금 많이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선교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선교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주님 전에 나오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왜 하는지, 무엇때문에 하는지 그것이 중요한것이지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의 사역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그들이 사역한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또 유대인들에게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인정해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유대지역에 사는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 통치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도인 우리가 지켜야 할 본질이다. 그래서 바울도 하는 말이 무엇인가? 이미 잘 하고 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힘써 돕는 것이다. 교회가 함께 가져가야 할 사역이다.
요한일서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가 선교를 가야 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 마음이 있는것은 너무 귀하고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내게도 기쁨이 되는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지만 내가 좋아서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선교가 이웃사랑의 모습이다.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 아닌가?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위해 하는 것 아닌가? 임원단을 비롯해서 동산지기 쓰임터 리더들 다 내 소중한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드리고 때로는 자존심도 내려놓으면서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본질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그 진실 아래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그 본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