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 야고보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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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1절
오늘부터 저는 저에게 주어지는 금요기도회 시간을 통해 야고보서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인구절벽 시대에 주일학교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코로나 이후 교회는 침체되어 교세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성도의 수 뿐만 아니라, 교회 안들어오는 실용주의, 물질만능주의, 포스터모덤니즘 그리고 인본주의는 더욱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이러한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성도들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 진리의 말씀 앞에 실천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지난 시절 우리는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경제도 교회도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변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교회와 성도들을 성숙으로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에 실망을 안겨다 주었고, 수많은 비난과 수모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좋은 말씀,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배시간 유튜브 실시간 방송들을 클릭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예배를 온라인으로 실시간 방송하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교회의 예배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검색한 내용을 빅데이터 하여, 나의 상황에 맞는 설교들을 찾아주고, 검색해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바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들에게 바른 교리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바른 삶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내지 아니하면, 세상은 점점 교회를 기독교를 손가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야고보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흔히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고 더 나아가 복음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신약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서론에 해당됩니다. 먼저, 야고보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당시 야고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 성경에는 서로 다른 네 명의 야고보를 소개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세베대의 아들, 유다의 아버지, 예수님의 동생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야고보를 사도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일찍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썼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저술 시기, 동기를 고려할 때, 야보고서의 저자를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주의 형제’라 불리면서 사도에 준하는,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7장 5절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한복음은 야고보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능력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메시야 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야보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게 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 후에 야보고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자신을 직접 보이셨는지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야보고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아마 이때 야보고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신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야보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의 신실한 종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됩니다. 후게 야보고는 순교하게 되는데, 주후 62년 네로의 박해로 총독 안나스에 의해 순교하게 됩니다.
본문 서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보고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얼핏 보면, 평범한 인사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야보고의 자기 인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혈육이고, 형제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종으로 소개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소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개인적인 혈연 관계를 걷어내고,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진실된 고백입니다.
사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형제였기에, 그분을 메시야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인정해도,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은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는 확신하였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는 야보고의 신앙고백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보고는” 이러한 야고보의 고백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자들이 신앙고백을 하기 원하는 야고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그렇다면, 종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종노릇 하던 삶에서 예수님의 종노릇 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흑암의 나라에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구원 받은 우리의 과제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순종하는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신자는 누구였을까요? “흩어져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 하노라”
야보고서는 다른 서신서들과는 달리, 수신자의 지역 정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편지의 수신자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라고 칭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라는 단어가 여기 사용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흩어지다, 분산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분단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가 남유다가 망한 후,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동 전역으로, 더 나아가 소아시아라 부르는 지역 넘어까지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흩어진 유대인을 “디아스포라”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 라고 해서 꼭 디아스포라 유대인만을 가르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로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서도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베드로와 요한이 각각 ‘흩어지다’, ‘열두지파’ 라는 표현을 했지만, 두 서신은 유대인들만을 위해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 지역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여 이룬 교회를 표현할 때,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야보고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향한 기록으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배경이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는 유대인들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방인의 의해 세워진 교회인데, 이 교회는 지역과 인종 그리고 지형을 뛰어 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교회, 내 사역’ 이라는 인식을 매우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애착심에서 열정과 열심히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더 넓은 차원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사역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흩어지다” 라는 표현 속에는 시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이 말은 민족의 시련 안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표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9-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은 많은 유대인 성도들을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흩어지게 되었지만,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메시지입니다.
야보고서 1장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서 ‘문안한다’ 라는 말은 서신서 중에서 야고보만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후서 1장 1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어떻습니까? 요한일,이,삼서에는 통일된 형식이 없습니다.
바울도 “문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문안하노라” 인사하는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두 번 쓰였습니다. 첫 번째 사용은 사도행전 23장 26절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여기서 문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그 다음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문안’ 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헬라어 ‘차이로’ 라는 단어인데,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2절의 “기쁘게 여기라” 라는 “차라” 라는 단어와 의도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시 초대교회의 어려움과 아픔 그리고 시험을 알고 계셨습니다. 어디 초대교회만 그러실까요? 우리의 아픔, 슬픔, 현재의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분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여 우리의 삶에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시편 31편 7절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견딜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과 기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임을 기억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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