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5: 1-5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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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창세기 35장 1-5절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외삼촌 집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의 지시와 은혜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처음에 장막을 치고 땅을 산 곳은 세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34장에 보면, 야곱의 외동딸 디나가 세겜 땅에서 한 족속의 추장 아들에게 큰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겜의 추장 아들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만약 나의 동생과 혼인을 하려면,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허락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야곱의 다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빼 들고 세겜 성읍에서 끔찍한 복수극을 벌였습니다. 이 엄청난 소식을 들은 야곱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합니다.
창세기 34장 30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여기서 야곱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어떤 반응을 했습니까? “나”만 걱정했습니다. 야곱은 이 끔찍한 가족의 불행을 앞에 두고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입장에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제정신을 가진 아버지라면 딸의 아픔에 통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가 벌여 놓은 복수극 때문에 자신의 집안이 멸망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두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분노를 쏟아 냅니다.
창세기 34장 31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이 두 아들의 말에서 드러나는 슬픔이 느껴지십니까? 그들은 디나를 “우리 누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야곱은 네 여인에게서 열두 자녀를 낳았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과 베냐민 외에는 다른 자녀들은 자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네 여인에게서 난 형제들 사이가 얼마나 복잡하고 긴장감이 감돌았을까요? 이복형제들끼리,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눈치를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가정사에 있어, 생명 같은 딸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불행에 대해 전혀 감정적으로 표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디나와 한 배에서 난 시므온과 레위는 절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딸에 고통에 대해 분개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야곱을 원망했습니다.
어째든,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은 불안해 합니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이 소식을 다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을 공격한다면, 이것은 큰 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5장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벧엘을 향한 행로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회개해서 올바르게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인간은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 각성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한적이 없습니다. 진짜 부흥, 진짜 회개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야곱의 기가막힌 스토리가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 25장에서 야곱은 장자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형 에서에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에서가 분노하여 야곱을 죽이려 하자, 어머니 리브가가 이러다 한날에 두 아들을 잃겠다 싶어 야곱을 외삼촌 라반으 집으로 야반도주 시킵니다. 외삼촌 집으로 가는 도중 야곱은 루스 곧 벧엘에서 잠이 듭니다.
야곱이 매우 고독한 시간을 겪고 있던 그 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 공식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창세기 28장 14-15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에게 ‘너와 함께 있겠다, 너를 지키겠다, 너를 이끌어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시면서 야곱을 떠나신 것일까요? 지금 응답하시고 답을 주시면 될 텐데,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떠나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을 통해 그를 만들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불순물이 빠지고, 뽑아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노동을 착취 당합니다. 그 험악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벧엘입니다. 밧단아람의 세월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그대로 야곱을 벧엘까지 이끌어 올리십니다. 야곱은 이 약속을 잊고 세겜에서 인생을 누리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야곱을 벧엘로 돌아가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35장 3-4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기 앞서 야곱은 자기 집에 섬기던 이방의 신상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야곱이 드디어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묻었다” 라는 단어는 땅에 감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각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숨긴 것입니다.
야곱이 이 우상들을 완전히 버릴 마음이었다면, 불사르거나 찍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고 숨김으로써 여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온전한 회개라 부르지 않습니다. 회개는 그 속에 있는 불순물까지 완전히 뽑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싸움은 평생 걸리는 싸움입니다.
창세기 35장 9-1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것은 야곱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주신 것은 야곱의 회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뒤로는 자신이 피할 길을 만들어 놓으려고 부단히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언약을 따라 야곱의 인생에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야곱은 결코 인간 스스로 온전한 회개를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의지적 결단만으로 회개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장한 회개가 일어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돌이키보다 우선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리라” 믿습니까?
그러므로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주님 앞에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실력과 수준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개선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을 우리를 뼛속까지 발목을 잡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회개나 부르짖는 개혁이나 갱신은 늘 위선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신실한 언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사랑과 신실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길은 오직 순종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매일같이 이끄십니다.
마틴 루터는 신자들의 모든 생애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100% 순종을 드린다고 아무리 말해도 주님 앞에 정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을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부패를 드러내시어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야곱을 계속해서 다듬어 가십니다. 놀랍게도 그가 인생에 의지하였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거두어 가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평생에 걸쳐 사랑했던 라헬이 먼저 그를 떠났고, 귀한 아들 요셉마저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노년에는 잠시였지만, 베냐민을 사지에 내어 주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다듬어 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믿게 한 순간부터 회개의 자리로 이끄시며, 우리의 평생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는 작업을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이미 다 지난 일로 치워 놓아서는 안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면서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여 돌이킬 것은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일을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로 붙들려 있던 유다 백성들을다시금 회복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포로로 붙들린 이들은 매일같이 등짝에 채찍이 날아들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서 무시무시한 고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희망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희망의 약속을 담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회복을 전합니다. 이방의 지배 속에 빛 없이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소식이 울려 퍼졌습니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진정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 7절에 세례요한은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메시지를 듣고 수많은 무리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 중 어떤 이들을 향하여 독설을 퍼붓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커다란 두 분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권력과 정치력을 행사했던 종교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이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무슨 세례가 필요하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 세례를 받으러 나온 이가 있다면,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야 하는데, 요한은 그들을 향해 엄청난 독설을 퍼붓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결의론적으로 해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서 적용할지를 아주 세세하게 따져 엄격하게 준수하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경건한 사람들로 서 있다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겠다는 것이 종교적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개가 종교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을 때는 자기 합리화와 위선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3장 8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아무리 아브라함이 우리 조삼이라고 외친다 해도 회개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고,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칭송받기를 즐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깨끗하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전통이나 종교적 열심,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는 권위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하나님 대신 의지할 구석이 되고 만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적인 열심만 낼 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또 다른 무리들이 세례를 받고자 나옵니다. 하나의 그룹은 놀랍게도 세리들이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경멸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받은 이들에게 고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같은 동족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소득을 얻었기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이들에게 종교적 열심에 대해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의 문제들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요한은 그들의 직업 윤리에 관해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과된 것 이외에 거두지 말고, 강탈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는 분명한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는 데 이는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왜 부과된 것을 더 거두려 합니까? 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합니까? 더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이 쌓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 요청하고 계신 회개는 탐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상수리 나무 아래에 감추었던 드라빔은 집안의 수호신이라 여겼던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빔이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내내 이스라엘은 이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탐욕이 있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 라고 말합니다. 이 탐욕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의 열매가 아닌 죄의 열매를 맺도록 만듭니다. 그러한 죄의 열매들은 커다란 사회 구조 안에서 공고화되어서 이러한 죄악을 정당화하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탐욕의 문제를 심각하여 여겨야 합니다. 특히 거대한 사회 경제적 구조 속에서 합리화 되고 정당화 되었던 탐욕스러운 일들에 대해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탐욕이 우리가 은닉한 드라빔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탐욕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불안입니다. 나만 그 대열에서 떨어져 있으면 뭔가 손해 볼 것 같고, 망할 것 같고 안 될 것은 같은 불안의 심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밑바닥에 진짜 심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제 과학과 의학이 좋아져서 100세까지 우리의 수명이 연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명이 길어질수록 불안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과학이 발달해서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불안합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깊은 병폐는 탐욕의 문제, 불안의 문제, 더 근본적인 불신앙의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안을 조장합니다.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 될 것이라는 불안 속에 모두 다 같은 길을 걷게 만듭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성도입니다. 성도는 하늘 아버지를 믿습니다. 성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는 자만이 탐욕과 불안, 그리고 사회 문제들의 유일한 해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불신앙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지하고 있던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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