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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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금요기도회>
마태복음 5:38-42
“분노 바이러스”
2019. 8. 23
조 정 수
제가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특히 액션과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제가 몇 년 전에 영화 평점이 높은 명작 영화들을 하나하나 인터넷으로 구입해서 보던 와중에 어느 한 재난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28일 후”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러한데요. 어느 두 과학자가 흉악범들의 폭력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신경세포에서 분노조절인자를 분리해서 약품을 만들다가 여기에 에볼라 바이러스를 결합시켜 어떤 바이러스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오직 살아있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분노만을 가지고 공격하게 된다는 무서운 내용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바이러스를 “분노 바이러스”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람이 이성을 잃고 오직 분노에 가득차서 사람을 공격하고 물어뜯는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어제까지 반갑게 인사했던 이웃도, 오늘 아침에 만나서 함께 학교에 갔던 친구도, 저녁에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가족도, 하루아침에 다 얼굴도 못 알아보고 무작정 쫓아와 공격하는 좀비들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분노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상이 그렇게 한순간에 지옥과 같은 아비규환의 세상이 된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뉴스들을 가만히 보다보면 분노 바이러스가 단지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한강 토막 살인사건”, 모텔 직원이었던 남자가 투숙객과 말다툼을 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토막 내서 한강에 버린 사건인데요. 범인이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솟구쳐 오르는 감정과 충동에 지배되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쫓아서 공격하는 영화 속 좀비들처럼, 이 사람도 그 순간에는 나를 화나게 만든 저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마치 일종의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마냥 사람이 돌변하고, 끝없는 폭력성에 지배되어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이런 사건들이 신문과 뉴스에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한강 토막 살인사건”이라는 이러한 끔찍한 강력범죄 뿐만이 아니라 “갑질”이라는 말로 사회 전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러한 풍조들도 마찬가집니다. 얄팍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갑질 또한 하나의 분노 바이러스가 아닐까요?
평소에는 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어느 순간에 참지 않고 밖으로 표출해버리도록 하는 분노 바이러스, 사실 우리는 모두 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는 태어나면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도 이 바이러스를 가진 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나를 건들면 혈기가 나오고,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보면 시기가 나오고,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보이면 미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바이러스를 “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에 물 들어서 죄가 끌고 가는대로 끌려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도리어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어요. 너의 안에 가득한 분, 시기, 악, 질투를 철저히 인내하고 억제하여 마침내 그것을 통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화가 난다고 화내지 말고, 때리고 싶다고 때리지 말고, 죽이고 싶다고 죽이지 말고.
죄가 이끄는 대로가 아니라, 죄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우리가 분노에 휩싸여 죄에 끌려갈 만한 상황들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들을 말씀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그 상황들을 대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세요.
먼저 38절 말씀은, 신명기 19장 21절 말씀을 인용하여서 하신 말씀인데요. 악을 행한 자에 대하여서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으라고 하신 율법을 제시하며 너희가 이것을 들어서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9절에서 이 율법에 반대하며 새로운 법도를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말씀대로 한다면, 누가 내 오른편 뺨을 치면 나도 똑같이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쳐야 되죠. 율법이 그것을 권장하고 있잖아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그리고 오른뺨에는 오른뺨으로.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셨어요. 당한 대로 갚아주지 말고, 당한 만큼 더 당해주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더 당해주라. 오른쪽 맞았으면 왼쪽도 시원하게 맞아줘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도저히 통용되기 힘든, 용납될 수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오른뺨이라는 말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오른뺨을 맞는다면 상대방은 무슨 손으로 때렸겠어요? 왼손으로 때렸겠죠. 유대문화뿐 아니라 근동문화에서 왼손은 부정한 손입니다. 오른손은 정한 손이죠. 만약에 오른손으로 맞았어도 기분이 나쁜데, 부정한 왼손으로 맞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픔보다도 그 모멸감 때문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왼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람이 아니라 가축으로 여기는 극도의 멸시가 담겨 있기 때문에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멸과 수치를 당하고도 성내지 말고 갚아주지 말고 오히려 왼뺨을 내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한 것을 되갚아주지 말고, 더 당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사실은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가르침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가 있나. 우리가 무슨 호구도 아니고. 왜 우리가 당하기만 해야 되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교회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이게 약점이 되어서 남들에게 큰소리 한번 못 내고. 그래도 우리가 참아야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잖아. 하고 속앓이하면서 살아야만 하나.
아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그 삶은 우리가 따르기가 너무나 괴로워요.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할 텐데, 스트레스만 쌓이고 짜증만 쌓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잘 따르고 지켜야 하는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미국의 필립 와그너 목사가 조사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목회자의 45.5%가 우울증을 갖고 있으며, 50%의 목회자가 목회를 견디지 못하고 5년 이내에 목회를 그만둔다고 합니다.
주의 길을 가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명을 받고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목회를 선택한 목회자들도 이럴진대, 평신도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당한 만큼 갚아주라, 이 한 마디만 하셨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주의 길을 가기가 수월했을 겁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눈물 흘릴 일도 줄었을 것이고, 우울증에 빠질 일도 훨씬 덜했을 겁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따르고 싶지 않은 말씀을 하시고 말았어요.
오늘 본문에 계속 이어서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나같이 따르고 싶지 않은 일들이에요.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것은, 재산상의 송사를 통하여 값싼 속옷을 빼앗아 가려는 자에게 그보다 훨씬 비싼 겉옷까지도 넘겨주라는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말은, 누군가 강제로 짐을 나르거나 물건을 전달하라는 봉사를 시킬 때 오 리를 넘어 그 두 배, 십 리를 가주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상대방의 요청을 묵살하지 말고 양보하고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하나 따르고 싶지 않은 일이고,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에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칼이나 창으로 싸운 것이 아니고, 원수를 짓밟은 것도 아니고, 모조리 깨부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돌 던지는 자들을 치유하시며,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만든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이 최고의 사랑, 이 고결한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아가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위에서 아래로 부어주는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이에요. 자식이 반항하고 거역하고 심지어 부모를 겁박한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베푸는 사랑, 이것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은 몸소 아가페를 실천하셨고, 주를 믿는 우리에게 너희도 아가페를 실천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할 자를 사랑할 뿐 아니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자라도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내가 낮아지고 상대방을 높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베푸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모습이 어리석게 보이고 비웃음 당할 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담대하게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가신 주님이 쏟으신 사랑을 우리가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우리를 축복하시고, 매를 맞아야 할 우리를 싸매어 주시고, 죽어야 할 우리를 살려주신 그 사랑.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그 사랑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점차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이 마지막 시대에, 과학과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그와 반비례하여 윤리와 도덕은 후퇴하고, 끔찍한 범죄가 난무하는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는 우리가 받은 사랑의 한 자락이라도 지켜 행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길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조금씩 걸어감으로써 우리를 찾아오는 모든 시련과 고난과 부당함에 맞서서 분노 바이러스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랑, 아가페 바이러스에 몸을 맡김으로 거룩하고 복되며 사랑이 넘쳐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