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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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금요기도회>
요한복음 21:20-23
“너는 나를 따르라”
2019. 5. 31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신 후에 베드로와 대화를 하는 장면에 대한 말씀입니다.
불과 3일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려 도망쳤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뿐만 아니라 수제자인 베드로까지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소리쳤던 도마마저도 그 호기로운 외침이 무색하게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곁을 지키던 제자들은 도망쳐버리고, 예수님의 곁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와 비웃는 자와 매질하는 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외롭고 서글픈 상황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제자들은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 죄송해서 그 모습을 차마 제대로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스승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힘겹게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한 그림으로 그들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혔을 것입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고, 귀를 막아도 십자가를 끄는 그 소리가 회중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들려왔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사람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시골에서 이제 막 올라온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나약할 때 옆에서 그 십자가를 대신 지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두고두고 제자들의 가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내가 짊어지지 못했을까” “왜 내가 그때 나서지 못했을까”
그 기억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지 사흘째 되는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침 일찍 여자들에 의해서 먼저 무덤이 열리고 시체가 사라진 것이 발견되었고, 이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3일전에 그들과 함께 계시던 모습 그대로셨습니다. 인자한 미소와 자상한 음성은 그들이 꿈에서도 다시 뵙기를 바라던 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찔린 자국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전과 같았습니다. 도망친 제자들에 대한 원망이나 실망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아침에 헤어졌다가 점심 때 다시 만난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나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로 날이 밝아올 때에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하신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 백쉰세 마리나 되는 물고기를 잡는 이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과거 네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똑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지만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났던 그 사건이 오늘 다시 한 번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면, 오늘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0절,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리고 그 밑에 12절을 보면 예수님이 곧이어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방금 잡은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 중에 몇 마리를 가져와서 그것으로 함께 아침을 먹자는 것이죠. 참으로 친근하고 자상하게, 마치 아버지처럼 그렇게 제자들을 예수님 계신 자리로 불러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밤새 지치고 허기진 몸이 회복되어감과 동시에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로 하고 도망쳤던 죄책감과 그 십자가를 대신 지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던 그 안타까움, 그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로 인해 침체되어 있던 영혼이 오늘 이 소박한 식사 자리에서 회복됨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흘이라는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제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굴곡을 경험하였지만 예수님은 동일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변함없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나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나 죽으실 때나 부활하셨을 때나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감정에 따라, 육신에 따라 쉽게 돌변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더 그랬습니다. 자신의 배 위로 올라오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를 잡는 충격적인 사건을 체험하고, 그 발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 라고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회개하였던 민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만큼 부정적인 변화도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곧이어 예수님을 붙들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항변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내가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만, 한 여자의 밀고 앞에서 오히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던 자가 보일만한 자세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죠.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보이지 말아야 할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아멘.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보고 요한의 장차 사역에 대해, 앞으로의 일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바로 전에 예수께서 자신에게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양을 먹이라는 위임사역을 받은 베드로는 과연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요한의 사역은 무엇일지 궁금했습니다. “나에게는 이러한 일을 주셨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주실까? 그 내용은 무엇이고, 그 결과는 어떨까?” 이런 인간적인 생각이 일어난 것이죠.
그러나 아마 베드로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예배시간, 특히 부흥성회나 특별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면 마치 불이 임한 것처럼 뜨겁게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죠.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알짝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들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에는 없어요. 다들 뜨거운 분들만 계시기 때문에. 그런데 다른 데 가보면 가끔 있다는 것이죠.
그런 분들은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어떻게 기도를 하는지, 어떻게 찬양을 하는지,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 이런 것이 궁금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혹시 그들과 비교해서 못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고, 내가 조금 뒤떨어지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이렇다 할 확신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맞을까?” “예수님은 나를 만나주지 않았는데 그냥 나 혼자 열심히 하는 것 아닐까?” “그래, 남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보자.”
이런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매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내가 다시 올 그때까지 그가 살아있든지 말든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너는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일은 그의 일이고, 너는 너의 일을 신경쓰라는 것입니다.
너의 일이 무엇입니까? 주를 따르는 일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하신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주를 향한 사랑 안에서 결코 흔들리거나 그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주를 따라 주가 맡긴 사명에 올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고개 돌리지 않고 오직 앞에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두 팔 벌려 찬양하고, 그 말씀에 깊이 젖어드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그 음성에 귀기울이고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왜곡되어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단지 한 다리 건넜을 뿐인데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변개해서 받아들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를 따르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환경에 흔들리고 감정에 휩쓸립니다. 이러쿵저렁쿵 사람들의 말에도 쉽게 현혹됩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보였던 그 모습은 마치 오늘 우리가 보이는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잘 흔들릴까, 왜 이렇게 잘 변할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까지도 예수님은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발 앞에 엎드리는 모습만이 아니라 등을 돌려 도망치는 모습까지도 예수님은 보듬어주시고, 심지어 자신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까지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처럼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에 실망할 필요 없고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 주시는 이도 주시요, 생명 주시는 이도 주시니, 우리는 주님만을 따르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어서 오늘도 내일도 기쁨과 평강 속에 살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시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