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 못할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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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에스겔 24:15-24
“감당 못할 고난”
2019. 2. 8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감당 못할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며, 그 일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도 하지 말 것을 요구당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에스겔은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본래 제사장 혈통을 타고난 에스겔은 서른 살이 되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을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로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래서 에스겔은 바벨론 땅에 함께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 참으로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에스겔 3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은 저 백성들이 에스겔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포로로 끌려온 현실의 참담함과 좌절감에 백성들은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원망과 분노가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가 뭐라고 외치든 들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들 앞에서 에스겔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스겔은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을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3장 26절입니다. 3장 26절을 한번 볼까요?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지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백성들에게 말해야 할 선지자를 벙어리로 만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밑에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에스겔 네가 벙어리가 될 것이지만 내가 너와 말할 때에는 그 입이 열려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오직 내가 너와 말할 때만 너는 말할 수 있고 그 외에는 벙어리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에스겔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그 입에 담겨지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극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역의 어려움과 답답함 속에서도 에스겔은 어디다 하소연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마음껏 호통 한번 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벙어리로 살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만 잠시 입을 열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벙어리 상태는 오늘 본문 말씀을 지나 24장 27절에 가서야 풀리게 됩니다. 장장 7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의 혀가 자유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혀가 풀려지기 전에 에스겔에게 끔찍한 비극이 찾아오고 맙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이죠. 에스겔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쳐서 빼앗아가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눈에 기뻐하는 것” 여기서 기뻐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마흐마드” 입니다. 이 말은 “보물, 소중한 것, 기쁨을 주는 것”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에스겔에게서 보물을 빼앗아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보물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그의 아내였습니다. 18절에 에스겔이 말하고 있죠.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에스겔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사건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요? 머나먼 바벨론 땅에서 벙어리로 살면서 어려운 예언 사역을 하며 근심과 답답함 속에 있을 때 그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은 그의 아내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녀를 에스겔의 보물이라고 인정하셨을 만큼, 에스겔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사건을 두고 “이스라엘 선지자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순간들 중의 하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너무나 끔찍했으며, 해도해도 너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주의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자에게 복을 줘야 할까요 벌을 줘야 할까요? 당연히 복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가요?
당연히 복을 줘야 하지 않겠어요?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벌과 저주라고 한다면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지금 저만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과거 하박국 선지자도 똑같이 가졌던 생각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잖아요. “왜 악인들은 저렇게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의인들은 이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이 호소처럼, 하박국 역시도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한다면 당연히 의를 행한 자가 복을 받아야 하고 악을 행한 자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은 복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주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어요. 그런데 더욱 가관은 이 크나큰 슬픔 앞에서 에스겔이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 라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것에서 그친 게 아니라 마음대로 슬퍼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고통에까지 직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에스겔은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다 초상집에서 상주가 해야 하는 일들을 말합니다. 가족이 죽으면 상주는 머리에 쓰고 있는 수건을 벗어서 머리를 풀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금지 당했습니다. 또한 조문객들이 초상집에 관례상 가져오는 음식들에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것뿐만 아니라 죽은 아내를 위해 남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조차도 지킬 수 없는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에스겔의 이러한 모습은 조문객들의 눈에도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 아내가 죽었는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렇게 가만히 있는가? 아침에 우리에게 와서 무슨 말을 하고 가더니 지금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고 있는가?
하도 이상하고 궁금해서 백성이 에스겔에게 물어봅니다. 19절이죠.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는 듣지도 않고 외면하던 백성들이 이제 반대로 에스겔에게 찾아와 먼저 말을 건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왜 이러고 있느냐? 이렇게 백성들이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너희가 에스겔이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지 아니하며 사람의 음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
20절부터 23절까지의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21절을 보면 “너희 눈의 기쁨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이와 같은 말을 봤었죠? 16절에 나온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네 눈에 기뻐하는 것” 에스겔에게는 이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그 아내를 하나님이 빼앗아가셨죠. 그럼 21절에서 말하는 “너희 눈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바로 앞에 쓰여있죠. “내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힐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현재 바벨론에 잡혀 온 백성들은 신앙을 상실했고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그들의 기쁨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의 함락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지금은 포로 신세로 전락해 있지만, 언젠가는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택함 받은 족속이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수차례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여 다른 민족에게 노예가 되는 수치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끝끝내 하나님은 기드온이나 삼손과 같은 사사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이 또 한 번 있으리라는 막연한 낙관주의가 바벨론의 포로 백성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왜곡된 믿음이 자신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여전히 선지자의 말에 귀를 닫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귀를 열고 그들이 스스로 선지지 앞으로 나아오게 하기 위하여 에스겔을 사용하셨습니다. 에스겔의 아내를 죽인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 계획대로 백성들은 에스겔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먼저 에스겔에게 질문하였고 에스겔의 말을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에스겔은 너희의 기쁨인 성소가 더럽혀질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성소가 더럽혀진다는 말은 곧 성소의 파괴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루살렘이 완전하게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예루살렘이 두 번이나 함락되었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건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직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희망이 부질없게도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완전한 멸망이 찾아올 것이라고 에스겔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뿐 아니라 자신들의 고향이 멸망하고 그곳에 있는 남겨진 가족들, 자녀들도 다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과 23절을 보면 너희가 에스겔이 행한 바와 같이 행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에스겔이 아내를 잃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초상집에서 해야 할 일을 반대로 행했던 것처럼, 너희도 예루살렘 성전을 잃은 뒤에 에스겔처럼 슬퍼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탄식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큰 슬픔과 고통에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허탈한 탄식만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24절에 가면 마침내 에스겔에 일어난 이 비극이 바로 너희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우리 2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에스겔은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보물을 잃은 것같이 너희도 성전을 잃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표징으로 에스겔은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에스겔에게 일어난 비극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너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성전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에스겔은 아내를 잃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상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충성한 에스겔이 아니라 저 패역한 백성들을 바라보고 계셨고 에스겔의 고통을 통해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도구로 에스겔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죄 없는 아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에스겔의 슬픔과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그가 애끓는 심정으로 말씀에 순종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아무런 수고의 대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상실의 아픔만을 떠안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모든 아픔을 감내하면서까지 순종하였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 이것 하나였습니다.
그의 유일한 보물인 아내도 잃어버린 마당에 그가 무슨 복을 바라고 무슨 상급을 바랄까요? 그에게는 이미 세속적인 그 어떤 상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 에스겔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백성들이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백성들은 회개하였을까요? 에스겔이 아내를 잃으면서까지 자신들에게 던진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돌이켰을까요? 만일 그들이 회개하였다면 에스겔은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내가 죽은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그 절망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저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에스겔은 그것을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에스겔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에스겔은 이미 백성들이 끝내 회개하지 않고 선포한 그대로 멸망에 동참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일은 “이 일이 이루어진 후”에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야 백성들은 비로소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에스겔은 아내의 죽음과 그 뒤에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고 그 고통을 모두 다 감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에스겔처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달자로 택하심을 받았는데 그 길을 가는 대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것이고 그 길을 간 결과 아무런 열매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 길을 가실 수 있겠습니까? 에스겔은 그 길을 갔습니다. 소망도 없고 고통만이 있는 그 길을 감당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이해하기 힘든 충성이요 인내요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인물을 또 한 명 알고 있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미 자신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고 어떠한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다 알고 계셨던 그 분은 기꺼이 그것을 감당하셨습니다. 도대체 그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기에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귀중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드린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끝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귀중한 성전이 멸망한 후에야 비로소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에스겔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은 슬픔과 고통과 절망일지라도 결국에는 생명을 살릴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로 감당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목숨과 목숨만큼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택하심을 받아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예배”의 사명을 능히 감당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는 주일 예배와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 단지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이런 회중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곧 예배이며 우리의 생명이 곧 예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모든 순간이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귀중한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현실이 고통과 눈물만 가득하다 할지라도, 너무나 아파서 외면하고 싶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이 길의 끝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0장 22절을 함께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 모두 믿음 안에서 충성하며 인내하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서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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