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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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열왕기하 2:12-18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
2020. 7. 22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엘리야의 승천 직후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갈멜산에서 850명의 우상 선지자들을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고, 수많은 이적을 일으켰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서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사는 본래 밭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였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열왕기상 19장 19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아멘.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났을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겨릿소는 멍에 하나를 소 두 마리가 양쪽에서 같이 메고 밭을 가는 것을 겨릿소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겨릿소는 소가 두 마리, 두 겨릿소는 소가 네 마리죠. 그러면 열두 겨릿소면 소가 몇 마릴까요. 네, 스물네 마립니다. 어떤 학자들은 스물네 마리가 다 엘리사 집안의 소유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그 중에 두 마리만 소유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스물네 마리든지, 아니면 두 마리든지, 어쨌든 엘리사는 최소한 두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었어요. 두 마리만 해도 큰 재산이죠. 엘리사의 집은 꽤나 부유한 집안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엘리사는 큰 사건이 없는 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서 평생 밭에서 농사를 짓고 소를 돌보면서 살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야가 나타나요. 엘리야를 만나고, 그때부터 ‘소를 몰고 밭을 갈던 인생’이 엘리야의 제자로서 사역에 동참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치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처럼, 엘리사도 자기가 가진 소를 아무런 미련 없이 잡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의 삶의 중심이 생업을 책임지던 배에서 예수님으로 옮겨진 것처럼, 엘리사의 삶의 중심도 농사를 책임지던 소에서 이제는 하나님 여호와 중심의 삶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옆에서 그의 영성과 지혜와 열심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착실히 훈련을 하고 선지자로서의 역량을 키워 갔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어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려졌을 때, 엘리사는 스승이 감당했던 사역을 이제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보고 소리를 지릅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습니다.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인 엘리야가 떠났다는 상실감이 그를 사로잡아 슬픔에 겨워 소리를 지르며 옷을 잡아 찢은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 슬픔에 겨운 외침과 행동은 정말로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져 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늘로 올려져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데서 오는 진짜 슬픔이었습니다. 12절 중간쯤에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는 정말로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 일을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은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분명한 실제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이 죽지 않고 육신이 그대로 있는 채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고, 당시에 상식으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엘리사는 진정으로 믿고 슬퍼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기, 엘리야가 승천한 요단강가에는 엘리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누가 있었는가 하면, 선지자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2장 7절에 보면,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멀리 서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지금 이 선지자의 제자들도 오늘 엘리야가 하늘로 들어 올려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열왕기하 2장 3절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가 벧엘에 방문했을 때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또 5절에 보면, 여리고에서도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똑같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말을 합니다. 이는 곧 엘리야의 승천이 비밀한 일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주셔서 웬만한 선지자의 제자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보고 싶으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50명의 제자들이 와서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기죠. 왜 하나님은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셨을까? 왜 굳이 와서 보게 하셨을까?
사람이 산 채로 하늘로 올려지는 이 전무후무한 놀라운 일을 왜 여러 사람이 목격하게 하셨을까?
여러분, 그것은 이 놀라운 일이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분명히 일어난 실제 사건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건의 증인으로서 이 사건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볼 수 있었어요. 요단강 물이 갈라져 엘리야와 엘리사가 마른 땅을 건넌 것과,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난 것과,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간 것을 다 목격하였고, 그리고 또 오늘 본문 14절에 있는 사건까지도 다 목격했습니다.
14절에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우리 14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아멘.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 물을 쳤습니다. 8절에서 엘리야가 했던 일을 엘리사가 그대로 따라하고 있어요. 손에는 똑같이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그러니까 지금 이 장면은 누가 봐도 엘리사가 엘리야를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하는 엘리야의 겉옷을 물려받았고, 엘리야가 보여준 능력을 엘리사가 똑같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엘리야의 뒤를 이은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오십 명의 제자들이 목격했어요. 15절에 보면, 이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은 것을 인정하고 그 권위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6절을 보면, 이들이 엘리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이에요?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져서 가다가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을 보내서 찾아보겠다는 거예요.
이들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분명히 두 눈으로 봤습니다. 다른 걸 본 게 아니라, 엘리사가 본 것을 똑같이 봤어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보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낱낱이 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이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고 있어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다가 사라진 것을 두 눈으로 봐놓고도 엘리야가 진정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 올라갔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냥 적당히 올라가다가 어딘가에 떨어져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적인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살아서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엘리야가 죽어서 영만 올라가고 육은 땅에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체를 찾아서 수습하고 장사지내기 위해 엘리사에게 요청합니다. 엘리사는 답답하죠. 아니 이것들이 같이 봐놓고 딴 소리를 하네. 여호와의 성령이 들고 올라갔으면 끝까지 들고 가지, 무겁다고 던질까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사가 보내지 말라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보내지 마라.”
하지만 17절에 보면,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사람들 좀 보내게 해달라고. 보내서 찾아보게 해달라고. 얼마나 끈질기게 요구를 하냐면, 엘리사가 부끄러워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한다는 말의 원어에 보면, “부끄러워하기까지, 걱정스러울때까지, 당황스러울 때까지” 이런 뜻이 있습니다. 17절은 원어의 뜻 그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였다”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조금 의역을 하자면, “얼굴이 붉어지도록 인내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강청하였다” 이렇게 번역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계속 조른 거예요. 조르고 조르니까 도저히 안 되겠어서 어쩔 수 없이 엘리사가 허락을 해줍니다. 어차피 가봐야 헛수고라는 것을 알지만,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거든요. 그래 보내라 보내. 보내서 한번 잘 찾아보라고 해라.
이렇게 엘리사가 허락을 해주었고, 그래서 오십 명이 가서 찾게 했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무려 사흘이 지나도록 온 산이며 계곡을 다 뒤졌지만, 당연하게도 결국 못 찾고 돌아옵니다. 이미 하늘로 올라갔는데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어요. 사흘 동안 헛고생만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이 엘리야를 찾고자 하는 그들에게는 헛수고였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말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50명이 사흘 동안 찾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주변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했다는 것은 곧 엘리야가 지상이 아니라 천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도리어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이 지상에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행하실 때에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그 중에는 역사의 중심에서 사건을 주도하는 자도 있고, 변두리에서 엑스트라로 잠깐 등장하고 마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 숭배로 어지럽혀진 이스라엘 가운데 엘리야를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고, 이제는 엘리사를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십니다. 이들은 분명히 역사의 중심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50명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처음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자”, 하고 목격자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가 본 것을 똑같이 보았습니다. 물이 갈라지고,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고,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사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어요.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헛된 것을 쫓아갔습니다. 이때에는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들리지 않아요. 내 생각이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내가 생각하는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리고 달려간 끝에 있는 것은 허무와 좌절입니다. 무슨 영광이나 상급이 있는 게 아니에요. 애초부터 헛된 일이었기 때문에 헛된 결과만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역사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역사의 현장에 있음에도 그 중심이 아니라 강 건너편에서, 참여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성경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삼천 명이 있는 반면에, 똑같이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며 교회를 세울 때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똑같이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수많은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시고 이적을 일으키실 때에 조차도 따르지 않고 보는 데서만 그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TV와 인터넷, 핸드폰을 통하여, 틀기만 하면 복음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때에도 여전히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았음에도 믿지 않고, 들었음에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이들의 삶은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된 삶입니다. 평생토록 수고하여 쫓아간 길의 끝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50명의 제자들은 엘리야를 찾았지만, 그곳에 엘리야는 없었습니다. 영광도 없고 상급도 없습니다. 찾고 구하는 그 어떤 것도 그곳에는 없습니다. 엘리야도 영광도 상급도, 지상이 아니라 천상에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50명의 제자들이 땅에서 헛된 것을 구하였지만, 엘리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엘리사가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
엘리사가 옷을 찢는 슬픔 가운데 구한 것은 하늘로 올라가버린 엘리야가 아니었습니다. 명예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만을 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분만 나와 함께하신다면,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 그분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어 주신다면, 앞에 놓여진 사역을 내가 능히 감당할 수 있고, 환난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역사의 중심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의 것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 아니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서 역사의 변두리가 아니라,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