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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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마태복음 9:9-13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021. 7. 28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성경기자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마태복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행적과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상당한 부분을 우리가 알지 못했을 겁니다. 다행히도 마태가 붓을 들어 마태복음을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위대한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가 예수님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는데요. 마태복음 10장 3절에 보면, 열두 명의 명단 중에 마태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요. 빨간 글씨가 보이시죠? 세리 마태. 마태는 자신을 소개할 때 “세리 마태”라고 소개합니다. 굳이 자기 이름 앞에 “세리”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세리 마태. 이것은 마태가 자신이 본래 어떤 인간이었는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리는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죠. 어느 나라든 세금을 걷는 사람은 백성들에게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가난하고 배가 고픈데, 남은 양식을 싹싹 긁어 가버리니까 누가 좋아하겠어요?
특별히 1세기 유대사회에서는 세리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뜯어갈 뿐만 아니라, 그 세금을 로마에 가져다 바쳤거든요. 로마는 지금 이스라엘을 식민지배하고 있는 원수인데, 그 원수에게 세금을 가져다 바치니까 얼마나 밉겠어요. 매국노나 다름이 없는 자들이에요.
로마 편에 붙어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은근슬쩍 자기들 주머니를 채우는 자들. 이것이 이때 당시 세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세리를 말할 때 그냥 세리라고 하지 않고 함께 붙이는 말이 있어요.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세리 뒤에 무슨 말이 붙습니까? “세리와 죄인들” 세리와 죄인들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고 있죠. 또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보면 세리 뒤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세리와 창녀들”
이런 표현들을 통해 볼 때, 당시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곧 죄인들이나 창녀들과 같은 취급을 받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신이 세리였다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그냥 100퍼센트 까발려요. 누구라도 감추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인데, 마태는 있는 그대로 다 드러냅니다. 나는 세리였다. 나중에 제자로 세움을 받을 때도 자신을 그냥 마태라고 하지 않고, “세리 마태”라고 분명하게 명시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볼 때, 우리는 마태가 자신의 과거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둡고 부끄러운 과거지만, 그는 그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에. 세리인 모습 그대로 부르셨어요. 남들은 손가락질하고 비난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세리라고 하는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마태라고 하는 사람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내는데 사용합니다. 마태가 드러내고자 하는 예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에 있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는 지금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로 오신 예수님의 뜻.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보다 깊이 그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예수님과 마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지금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던 중이었습니다. 그 곳은 어디냐면 가버나움이에요. 오늘 본문 위에 9장 1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째로 들고 왔죠.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고치셨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능. 그것을 예수님이 갖고 계시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을 떠나서 지나가시던 길에 마태를 만나신 겁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리로서 업무를 보는 세관에 앉아서 그날도 열심히 백성들에게서 얼마를 걷어야 할지 계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얼마를 내가 빼돌릴 수 있을지도 계산했을 겁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다들 딴주머니를 차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을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렇게 세관에 마태가 앉아 있을 때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마태를 보시고 한 마디를 던지십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그 한 마디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었어요. 죽은 나사로에게 나아오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힘입어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나를 따르라는 그 말씀은 마태를 세관에서 일어나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세관에 앉아서 남들의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자기 배를 불리며 성공적인 삶을 살던 마태였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어요. 세관이라고 하는, 자신의 부와 성공이 보장된 인생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배를 버린 것처럼, 마태 또한 자기 삶의 기반을 버린 것입니다. 동족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 권능이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태의 인격이 180도 바뀔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더 이상 돈을 쫓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수전노가 아닙니다. 그러한 어두운 삶은 이제 과거가 되었어요. 옛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 그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는 이제 돈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관에 눌러앉아 있지 않아요. 세관을 버렸습니다. 돈밖에 모르던 자신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 그것이 변화된 마태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도 마태와 같이 변화되었습니다. 내 삶에 안주하고, 돈의 노예로 살던 그러한 옛사람에서 일어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기에,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는 우리 모두가 그 말씀에 힘입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다 된 줄로 믿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이제 예수님의 마태의 집으로 가십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예수님은 세관에 있던 마태를 부르실 때도 거리낌 없이 부르시더니, 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태의 집에 가서 앉으셨어요. 그리고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남들이 다 꺼리는 세리, 죄인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신 거예요.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그곳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앉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의 소식을 들은 동료 세리들과 다른 죄인들이 온 것일 겁니다. 일반 백성들 중에는 누구도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는 일이 없는데,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와서 식사를 한다고 하니까 궁금했겠죠. 저 사람은 누구길래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을까? 그래서 찾아왔다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을 겁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봤을 때는, 참, 마태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게 되니까 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나오게 되었다는 그런 좋은 모습이죠.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어땠을까요? 그들이 보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니, 아주 혐오스러운 모습이었을 거예요.
유대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친밀한 우정을 돈독하게 만드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올바른 사람들과 올바른 종류의 음식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다른 종류의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다른 종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방인들, 그리고 죄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배척했어요. 자기들과 같은 사람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이하지 않았어요.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세리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상상 못할 일인데, 거기에 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합류한다? 끔찍한 일이죠.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죄인이 한두 명도 아니고 떼거리로 모여서 식사를 하다니.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너무나 끔찍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항의를 하죠.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호시탐탐 예수님을 공격할 빌미를 찾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곧바로 공격해요.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너희 선생이 저 죄인들과 똑같은 사람 아니냐?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거죠.
끼리끼리 논다고, 죄인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보니까 예수라고 하는 너희 선생도 저 죄인들하고 똑같은 인간 아니냐?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은 제자들에게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에요? 예수님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예수님이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하셔요. 오늘 본문 12절인데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아멘.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시 유명한 격언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머물러야 한다. 이 격언을 통해서 말씀하셔요. 의사의 사명은 병든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머물러야 돼요.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건강한 자에게 머무는 동안에 병든 자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시급히 돌봐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 의사들이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사들이 병자들을 돌보러 가야 하는데 가지 않아요. 그들에게서 병이 옮을까봐, 전염될까봐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를 않아요.
지금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죠. 죄인들을 배척하고, 우리와 다르다고 구분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아요. 저들과 조금만 가까이 하면 나도 저들처럼 죄인이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 죄가 옮을까봐.
우리나라 시조에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이런 시구가 있는 것처럼,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어야 하는지가 상당히 중요하죠. 백로는 까마귀 노는 곳이 아니라 백로가 노는 곳에 속해야 돼요.
마찬가지로 병든 자는 병든 자들끼리 모여야 합니다. 그 모인 곳을 우리는 병원이라고 해요. 그런데 병원에는 병든 자만 있는 것이 아니죠. 병원에는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습니다. 병든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병든 자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치료받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다 죽고 말아요. 누군가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돌봐야 합니다. 그것이 의사예요. 오늘날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의료진들이 정말 고생하고 있는데요. 이 더운 여름에 비닐방균복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코로나 검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더위와 과로로 쓰러져서 실려가는 사람들도 있죠. 그만큼 힘든 일인데도 사명감을 가지고 일합니다.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코로나 검사하러 온 사람을 마주하는데, 두려움이 없을까요? 혹시라도 코로나에 감염되면 어떡하나. 두려울 거예요. 그러나 그 두려움을 이기고 사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병든 자들에게 다가가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뜻입니다. 의사는 병든 자에게 가야 한다. 세리들, 창녀들, 죄인들. 저들이 다 영적으로 병든 자들 아닙니까? 물질이 좋고, 세상이 좋고, 권력이 좋아서 육신은 건강하고 튼튼하지만, 영은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는 병든 자들.
저들에게 의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없어요. 아무도 의료지원을 하지 않아요. 빨리 검사를 하고 격리를 하고, 치료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요? 의사들이 다 건강한 자들한테 머물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자들 편에 붙어서 병든 자들을 손가락질하고, 업신여기고, 배척해요. 그래서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병든 자들은 방치됐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현실이에요. 끼리끼리.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끼리, 죄인들은 죄인들끼리. 자기들이 속한 그룹 안에서만 모이고, 자기들끼리 교제해요. 경계를 넘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 경계를 넘어 죄인들의 곁에 다가가 그들을 품고 돌봐야 하는데, 지금까지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경계를 넘어 죄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앉아 같이 식사를 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을 살리시려고. 의사로서 그들의 병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새힘을 주시려고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가 당장에 일어나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던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그의 영이 치유되니까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계산하던 그의 붓이 이제는 마태복음이라고 하는, 위대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지 않으셨다면, 그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 한 마디를 건네지 않으셨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마태복음이라는 것을 읽어볼 수 없었을 겁니다. 마가, 누가, 요한. 이 세 복음서만 볼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가 마태복음을 볼 수 있는 것, 이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다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다가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호세아서에서 인용하셨어요.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어는 조금 다르지만 뜻은 동일해요. 나는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애가 없었습니다. 예배는 열심히 드렸어요. 그런데 그 예배가 형식은 있으나 그 안에 인애가 없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습니다. 그냥 윗세대가 드리던 그대로, 순서에 따라서 기도문 암송하고, 찬송하면서 껍데기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예배 드렸으니까 나는 거룩하다고 믿었습니다. 예배가 어떤 면죄부라도 되는 것처럼, 성전이 무슨 세탁소라도 되는 것처럼. 한 주 동안 죄 짓고 살다가 하루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 드리고 나면, 내 죄가 사라지고 깨끗하게 세탁이 되는 걸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꾸짖으셔요. 너희가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려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애와 긍휼,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그 말씀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배우라는 것입니다. 배우라. 너희가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고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너희가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아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제사보다 긍휼을 원한다고 하셨는데, 왜 너희가 제사에만 집중하고 형식에만 집중하고, 정작 긍휼을 버리느냐는 겁니다.
‘저기 따로 떨어져서 방치된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정죄하고 핍박하느냐.’ 이것이 예수님이 호세아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뜻입니다. 또 13절을 이어서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 말씀과 동일한 말이죠. 의사가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는 그 말씀처럼, 예수님은 내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바리새인과 같이, 겉으로만 의로운 척하는 자칭 의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은 열심히 지키고, 제사도 열심히 드리지만, 그 속에 긍휼이 없고, 끼리끼리 모여서 우리가 거룩하다고 말하는 자칭 의인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자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의 관심은 자칭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있어요. 병 들어서 하루하루 말라가는 영혼들,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병이 옮을까봐 사람들이 꺼려하고, 배척하는 영혼들. 의사가 필요한 병든 자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꺼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셔요. “나를 따르라.”
마태를 일으켜 변화시키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 모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어요.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 한 마디를 던지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릴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님이 다가오셨을 때,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 바로 그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크고 작은 죄를 지었어요. 알고 지은 죄도 있고, 모르고 지은 죄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요. 병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돌볼 손길이 필요해요.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마태에게 다가가셨던 것처럼, 죄인들에게 다가가셨던 것처럼, 경계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분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벗어던지고,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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