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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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사도행전 8:1-8
“슬픔이 기쁨으로”
2021. 6. 23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그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큰 슬픔이 있었지만, 그 후에 오히려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기쁨이 있었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스데반은 신성모독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공회에 붙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이 전하는 말씀에 마음이 찔리고 격분되어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어요.
그런데 이때 당연히 지켜져야 할 법적인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아직 자기 변론이 끝나지도 않았고, 최종판결이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무단으로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을 던졌어요. 법정질서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사도행전 7장 57절에 보면, 그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말을 하고 있는 중에 마음이 격분되어서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든 것입니다. 법정 질서를 무시한 거예요.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법정의 질서가 어지럽혀져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법정을 어지럽힌 자들을 다 퇴장시키고, 질서를 잡아야죠. 그리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야 마땅하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질서를 잡기는커녕 너도나도 다같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했습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의 말에 마음이 찔리고 격분되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흉흉한 현장에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참혹한 순간에도 평안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격분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홀로 평안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격분하지 않고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 60절에 보면, 스데반이 죽기 전에 한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은 스데반이 저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저들을 용서하여주실 것을 요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 하셨던 것처럼, 나를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했어요.
한번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화가 나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과, 그 돌에 맞으면서도 평안한 사람. 그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요? 누명을 쓰고 죽는 마당에 억울하다고 악을 쓰고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마지막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보니까 저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죽어서 영원한 천국으로 가지만, 저들은 여전히 예수를 모르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저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알 수가 없죠. 스데반이 어떤 마음으로 숨을 거두었는지 알지 못해요. 그저 신성모독을 한 범죄자가 죽은 것을 속 시원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그러한 모습이 나와요.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는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스데반이 죽은 것을 마땅한 일로 여겼습니다.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잘 죽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구나. 이단은 다 저렇게 죽어야 돼.’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단지 생각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어요. 1절을 이어서 보면, 스데반이 죽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 박해를 주도한 자가 바로 사울이에요.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교인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도록 교회를 뒤집어 엎었어요.
예루살렘에 가만히 있다가는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스데반이 죽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더 큰 슬픔이 닥쳐온 것입니다. 슬픔이 더 큰 슬픔으로 나아간 것이죠.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 슬픔이 오직 교인들에 한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교인들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있었어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추종하면서 율법을 어지럽히고 안식일을 어기던 이단 사이비를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몰아낼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슬퍼하고, 예수를 배척하는 자들은 기뻐해요. 그것이 지금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사울이 어떻게 교회를 박해하였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잔멸하다’는 말은 본래 헬라어로 ‘황폐하게 하다’ ‘망하게 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파괴한다는 의미예요. 따라서 교회를 잔멸한다는 말은 교회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아주 철저하게 파괴하면서 돌아다녔는데, 그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집집마다 쳐들어가서 잡아다가 감옥에 넣었다는 겁니다.
감옥에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 것이죠. 이미 스데반도 법정 질서 다 어기고 죽였는데, 감옥에 잡혀온 사람들을 살려둘까요? 모질게 고문을 하고, 그 입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다 죽이고 말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누가 방해하거나 저지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면 다 한통속이기 때문에.
감옥에 잡아가고, 고문하고, 죽이고. 이 일이 예루살렘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난리통에 성도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죽게 생겼어요. 때문에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가 오면 지붕 밑으로 피해야 하는 것처럼, 목숨을 잃을 위기가 찾아오면 당연히 도망쳐야죠.
오늘날 우리도 코로나라고 하는 위기 속에 있는데, 이 코로나를 피하기 위해서 마스크도 쓰고 방역도 철저히 하고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위기가 오면 지혜롭게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비록 삶의 터전을 잃고, 성전이 있는 본향에서 떠나야만 하는 괴로움이 있지만, 내 목숨을 보전하고, 나아가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버티고 있는다고 신앙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도망친다고 해서 신앙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구하는가? 그것이 중요해요. 내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가더라도, 그곳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구한다면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에요. 비록 예루살렘에 큰 슬픔이 엄습했지만, 이 슬픔으로 인해서 앞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돼요.
오늘 본문 4절을 볼까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살기 위해 도망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희한하죠? 박해를 겪고 나서 오히려 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해요.
이것이 교회의 이해할 수 없는 생명력입니다. 박해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면, 잠시 움츠러드는 듯하다가 전보다 더 성장을 하고 부흥을 해요. 그래서 이것을 교회사적으로 볼 때, 박해와 순교가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라고 평가를 합니다.
박해와 순교가 어떻게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가 있을까요? 성장을 하려면 거름을 주고, 물도 넉넉하게 주고, 햇볕도 쐬어주고, 최대한 성장하기 편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할텐데, 교회는 오히려 박해와 순교 속에서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박해를 당해 흩어진 사람들로 인하여서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사도를 제외한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에서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일구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 인물을 오늘 본문에서 주목합니다. ‘빌립’이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스데반에게 맞춰져 있던 초점이 이제 빌립에게로 옮겨갑니다. 스데반이 순교의 상징이었다면, 빌립은 전도의 상징입니다. 스데반이 교회 박해의 상징이었다면, 빌립은 교회 부흥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극적으로 대조하면서 교회가 어떻게 슬픔을 극복해 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 비결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답이 복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슬픔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온 땅으로 흩어졌어요. 그러면 당연히 그곳에서 무엇이 전파될까요? 당연히 슬픔이 전파될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누가 이사를 왔는데, 안색이 어둡고, 인사를 해도 본체만체하고,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 동네가 서서히 슬픔이 전염될 겁니다. 누가 웃으면 같이 웃게 되는 것처럼, 누가 울면 나도 괜히 기분이 다운되고 안 좋거든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늘 본문에 보면, 슬픔이 전염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전해졌습니까? 복음이 전해졌어요.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특별히 빌립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조명하면서 그가 행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까,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함께 일곱 집사로 택함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박해를 피해서 간 곳이 사마리아 성이었어요.
사마리아는 우리도 알다시피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그러한 사마리아 땅으로 빌립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어요. 사도들도 가지 않았고, 집사들도 가지 않았어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그런데 누가 됐든지,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해야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은 분명히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던 중에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박해가 있고 난 뒤에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었습니다.
평안할 때는 전파되지 않다가 박해가 있고 나니까 복음이 전파되었어요. 희한한 일이죠. 박해와 순교의 슬픔이 임하고 나니까 비로소 복음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사건을 두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핍박의 손을 빌려 제자들을 세계 각지로 흩으신 사건이라고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도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머물고 있는 제자들을 핍박을 통해서라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모질게 매를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를 볼 때 참으로 오묘하고 놀랍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너무나 냉혹하고 매정하다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인 이상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쩌면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실한 제자들을 그토록 모질게 대하실 수가 있을까?
요새 뉴스에 보면, 노동자에 대한 인권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죠. 비정규직으로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복지를 받지 못하고, 마치 공장의 기계부품처럼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면 새 부품으로 바꿔서 사용하는 그런 처지에 놓여져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이 뉴스에 종종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의분이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꼭 이런 노동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하나의 소모품과 같이 여기시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이 소모품으로 여겨지십니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여지는 모습만 보면 그렇거든요. 제자들을 타지로 파견보내기 위해서 용역업체를 불러다가 난장판을 만들고 있잖아요.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냉혹하고 무정한 분으로 오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기 뜻을 위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소모품처럼 험하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개를 하셨는데, 이러한 말씀으로 소개를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은 틀림이 없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은 진리가 아닐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까요? 거짓말은 마귀가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오직 진실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그토록 모질게 대하실까요? 왜 제자들을 핍박 가운데 몰아넣으실까요?
주석가들은 앞서 말씀한 대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어 가도록 성도들에게 핍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저 넓은 세상의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핍박의 바람을 부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로 인하여 슬픔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풍비박산이 났어요. 너무나도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쩌면 성도들 가운데, ‘괜히 먼저 믿고 성도가 되는 바람에 박해와 핍박을 당하고, 막중한 일을 떠맡게 되었다’고 한탄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저도 과거에 그런 기억이 있어요. 예전에 광양 모교회에서 유초등부 시절에 마침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벽돌을 누가 싸게 준다고 해서 장로님 용달차를 타고 같이 벽돌을 가지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서 용달차에 벽돌을 한참을 싣고 다시 장로님하고 집사님들 틈바구니에 끼어앉아서 교회로 돌아왔어요. 그때는 교회에 사람이 없으니까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일꾼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린 저도 같이 가서 일을 해야 됐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일이 별로 불만스럽지가 않았어요. 원래 전부터도 가끔씩 교회에 불려가서 일손을 거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차차 나이가 들다 보니까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내가 그때 교회에 가서 일을 했을까? 하필 교회가 건축을 하던 때에 교회를 다녀서 고생을 했을까? 차라리 교회 건축 다 끝난 뒤에 교회를 다녔으면 편하고 좋지 않았을까. 이런 철없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저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많을 거예요. 그냥 한평생 편하게 살다가 늘그막에 회개하고, 세례 받아서 평안하게 천국에 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겁니다.
좀 더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죽기 전에 믿으면 되지 않겠나. 전도하고, 봉사하고, 이런 궂은일은 지금 믿는 사람들이 다 하시고, 나는 나중에 죽기 전에 회개하고, 다이렉트로 천국에 가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쉽죠. 그것이 사람 뜻대로 된다면, 세상에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될 리가 없지요. 믿음이 내가 계획하고 마음먹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무슨 보험처럼 나중에 사고가 일어나면 그때 보험료 타듯이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때에 주님이 믿음을 주시고 회개의 영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주실 때 받아야지, 놓치고 나면 언제 또 그 기회가 올지 몰라요.
만약에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온 예루살렘 성도들처럼, 지금 내가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말 못할 핍박과 고난이 찾아온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믿음을 갖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모진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결단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건대, 우리가 기꺼이 자원하여서 믿음을 갖고 주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결단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보낼 자를 찾으실 때,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 라고 담대히 외쳤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저함이 없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기꺼이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새로 정착한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언제 나를 잡으러 올까, 정체를 숨기면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그들은 숨지 않았습니다. 비록 살 길을 찾아 먼 곳까지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숨지 않았어요. 오히려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먼저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해야했지만,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기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도망친 곳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극심한 슬픔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슬픔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했어요. 기쁜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헌신을 통하여서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에 기쁨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그 성,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지금이 어쩌면 우리에게 고난과 핍박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떠났다가 핍박이 지나간 후에, 삶이 조금 안정된 후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평안이 없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 고난중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신실한 삶 가운데 있을 때, 참된 기쁨이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슬픔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이 거친 풍파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며 뜻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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