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이 그대로 있으나 안심하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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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사도행전 27:18-27
“풍랑이 그대로 있으나 안심하라”
2021. 5. 12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서 바울의 행적을 살펴보면,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사람들이 마련하여 준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로마서 15장 25절과 26절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아멘.
이 기록대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마련한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 밑에 로마서 15장 28절을 보면, 이후에 바울이 무엇을 하려 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8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지금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친 후에 너희에게 들르겠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바로 로마교회죠.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나면, 너희에게, 로마교회에 들르겠다. 그리고 그 후에는 서바나로 가리라. 서바나는 스페인입니다. 이때 당시 스페인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지역이었어요. 바울은 이 서바나를 자신의 최후의 사역지로 생각했습니다. 마게도냐 지역과 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이제 마지막 남은 서바나 지역에서 마지막 사명을 불태우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계획이 무산돼요.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버립니다. 그 유대인들은 아시아에서부터 바울을 쫓아온 사람들이었는데,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붙잡고 때려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천부장이 사태를 수습하고,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신변보장이 되었지만,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갔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여 아무 죄가 없음을 밝혔지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총독 앞에서 고발하는 바람에 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해요. 가이사는 로마황제의 칭호죠. 바울이 내가 로마에 가서 직접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겠다고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까지 가는 여정길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애초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곧바로 로마로 가려고 했어요. 예루살렘에서 붙잡히는 바람에 그 계획이 어그러지고 2년이나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어쨌든 로마로 가게 됐어요. 비록 로마군인들에게 압송되는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바울이 가고자 했던 로마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여정이 만만치가 않아요.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상황이 펼쳐집니까? 큰 풍랑을 만나서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펼쳐져요.
사도행전 27장 9절에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바울과 군인들은 “미항”이라고 하는 작은 항구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9절에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항해하기가 위태하다고 말해요. 금식하는 절기는 대속죄일을 가리키는데, 이 당시 대속죄일은 아마도 10월 5일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죄일이 지났다는 것은 못해도 10월 초에서 늦게는 10월 중순이 지난 때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무척 항해하기가 어려운 시깁니다. 지중해는 9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돌풍이 많이 불어요. 특히 11월부터 1월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붑니다.
그래서 이미 10월 초가 지난 지금 시점에는 항해하기가 위태로워요. 꼭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지금 항해하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가자고 의견을 냅니다. 아무래도 바울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선교를 많이 다녀봤기 때문에 지금 시기에 바다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항해를 하면 손해가 클 거라고 설득을 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죠.
선장과 선주가 항해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죄수들을 인솔하는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그들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미항이라는 항구는 너무나 작아서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했어요. 그래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뵈닉스라는 항구로 가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미항은 규모가 작아서 먹을 음식도 변변치 않고 유흥을 즐길 만한 곳도 없지만, 뵈닉스는 제법 규모가 있거든요. 충분히 내년에 항해가 가능한 시기까지 겨울을 보낼만한 곳이에요.
그리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배로 약 3시간 정도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여기로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조금만 위험을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바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가 미항을 떠나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에 어떻게 돼요? 사도행전 27장 14절에 보니까,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유로굴로는 북동풍이라는 말인데, 북동풍이 지금 광풍이 되어서 불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광풍에 배가 떠밀려 위기를 맞게 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속절없이 광풍에 떠밀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배를 조종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에 손쓸 방도가 없어서, 이튿날에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바다에 버린 겁니다. 살기 위해서.
그런데 그래도 안 되죠. 짐을 버린 것만으로는 안 돼요. 그래서 또 어떻게 합니까? 밑에 19절에 보니까,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짐을 버린 것으로도 안 돼서 이제는 배의 기구까지 내버렸습니다.
배의 기구라는 것은 배를 조종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들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선원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버렸어요.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도박이에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배의 기구까지라도 버려서 조금이라도 배를 더 가볍게 해서 운명에 맡긴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도 결국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오늘 본문 20절에서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배에서 짐도 버리고 기구까지 버렸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이 배는 풍랑 속에서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고 휩쓸리는데, 그것이 벌써 여러 날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폭풍우가 거셌으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어요.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그 어두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그저 배 기둥을 부여잡고 벌벌 떨기만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지내다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고 맙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이 표현은 헬라어 어법적으로 단번에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차츰차츰 그것이 없어져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짐도 버리고 기구까지 버렸는데,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었다면 짐을 버리는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손을 놓고 있었겠죠. 하지만 살 수 있다는 조그마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짐도 버리고 기구까지 버린 겁니다.
그러나 그 수고가 무색하게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아요. 여전히 풍랑입니다.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희망이 없어진 거예요. 희망은 내가 바라는 무언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지금 선원들의 희망은 무엇이겠어요? 풍랑이 걷히고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 여러 날이 지나도록 풍랑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아요.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큰 풍랑이 그대로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그러드는 기미가 보여야 하는데 그대로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희망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풍랑이 걷힐 것이라는 희망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라져요.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어쩌면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큰 풍랑 가운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년 연초부터 코로나라고 하는 풍랑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어요. 생업이 힘들어지고, 사업이 휘청거리고, 건강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사태가 좀 진정되나 싶으면 또 어디선가 대량으로 확진자가 발생해요.
벌써 1년이 넘도록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다 보니까, 이제는 마스크가 한몸처럼 느껴집니다. 마스크를 벗고 있는 게 더 어색해요.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1년이 가고. 그런데도 여전히 코로나가 그대로 있습니다. 풍랑이 그대로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그 풍랑 속에 있는 선원들은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습니다. 삶의 희망이 없어졌어요.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둠만이 있고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아요. 또 갖고 있는 짐을 다 버렸기 때문에 먹을 식량도 없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밥도 먹지 못하고 풍랑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모두가 절망하고 있는 이 순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똑같이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풍랑 속에서, 똑같이 식량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는데도, 그러나 바울 한 사람만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드시 이 풍랑 속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다시 봐 볼까요?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바울은 먼저 과거에 자신이 항해를 하지 말자고 주장했던 것을 따르지 않아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것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람들을 책망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이것은 너희가 지금의 상황이 일어난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전에는 너희가 내 말을 안 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들으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바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밑에 22절 말씀인데요. 우리가 22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아멘.
바울은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그런데 여러분, 이제는 안심하라는 말은 보통 언제 쓰는 말입니까? 위급한 상황에서 뭔가 안전한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하는 말이죠. 정말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야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섣불리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안심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분명하게 생명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도 살아나리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살아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이 바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지금 무슨 심정일까요? 어쩌면 바울이 두렵다 못해 정신이 나가서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 사람이 미쳐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구나.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그렇지만 지금 바울은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죠.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합니다. 배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요.
그리고 그가 이토록 흔들림 없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바울 곁에 서서 말하였다고 증언해요. 그리고 그 사자가 한 말이 밑에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 말씀인데요.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아멘.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울이 이 풍랑 가운데서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에 대한 이유였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이것이 바울이 이 풍랑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반드시 가이사 앞에 가야 돼요. 로마 황제 앞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문을 받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사명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멈출 수 없습니다. 아직 달려갈 길이 남아 있어요. 이 풍랑조차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동안 숱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경주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그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완수해야 했고, 하나님은 바울이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풍랑에 스러지지 않습니다. 그 맡은 사명을 위해 끝까지 경주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고, 그 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힘들 지라도, 결코 좌초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의 사명이 있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이 있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봉사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사명,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사명, 여러 사명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각 사람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명은 그냥 선심 쓰듯이 주신 것이 아니에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당할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어요. 지금 여전히 풍랑이 그대로 있지만, 반드시 생명이 보존될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풍랑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고, 정신이 나가지도 않았어요. 어느 때보다 또렷한 정신으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할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라고 하는 풍랑 가운데 있습니다. 여전히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고, 여전히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재난문자가 핸드폰에 날아오고 있고, 여전히 우리의 삶은 팍팍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전하십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 25절을 우리가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풍랑이 그대로 있으나 바울이 하나님을 믿고 안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옥죄이는 풍랑 가운데서, 우리에게 사명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또한 바울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