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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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에베소서 5:15-21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2021. 4. 28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에요. 필수사항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던 욕심, 이방의 풍습, 저속한 생활양식. 이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옛 사람이에요. 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분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그 길을 가는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사람을 입었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앞에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아멘.
너희가 전에는 어둠에 거하는 자로서 욕심을 따르고, 구습을 따르고, 너희가 가고 싶은 데로 마음껏 살았지만. 이제는 너희가 주 안에서 빛이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라.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울이 권면합니다. 본문 15절을 볼까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이미 주 안에서 빛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행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가 뭘 해도 구원을 받겠지, 용서를 받겠지. 이런 생각으로 살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것을 깊이 고민하고, 주의하여서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든든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 내가 구원을 얻었다! 이러한 영적인 도취감에 빠져서 마치 오늘날 구원파와 같이,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잘못된 구원관에 빠지지 않고. 더욱 행실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 생각까지 깊이 주의하여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그러면서 바울은 어떤 것이 지혜로운 행함인가를 말씀합니다.
16절에 보니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로운 자의 첫번째 비결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 이 말은 우리가 볼 때 흘러가는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말이 약간 달라요.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시간을 속량하라”
속량이 무엇입니까?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지불하면서까지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시간을 속량하라고 말하는데, 이 시간은 1초, 1분, 1시간 이렇게 흘러가는 일반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시간은 헬라어로 카이로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특별한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계획을 이루시는 때, 나를 주목하시는 때,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때.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카이로스를 속량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책에 오늘 이 본문을 보면, 조그맣게 숫자 2에 괄호를 해서 밑에 주석을 달아놨어요. 보면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기회를 사라” 라고 쓰여 있죠. 카이로스를 “기회”라는 말로 번역을 한 겁니다. 맞는 말이에요. 기회, 카이로스는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에게 계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기회를 사야 합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시간계획을 세우고, 언제 일어나서 무슨 일을 하고, 잠은 몇 시간을 자고, 시간을 내서 생산적인 뭔가를 하고. 이런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1분을 살아도, 주의 뜻을 구하는 카이로스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라고 덧붙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그 기회를 사서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날 문득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그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은 술과 성령을 대조하면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술을 언급한 것은 이 당시 에베소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에 대한 문제 때문인데요.
에베소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 도시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예요. 바닷가 항구도시다 보니까 당연히 우상이 가득합니다. 무사히 배 타고 나갔다 돌아오라고 빌고, 바다가 잠잠케 해달라고 빌고, 해적들 잘 피하게 해달라고 빌고, 그러니까 도시에 우상과 미신이 가득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항구에 발달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술입니다. 오랜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원들이 제일 먼저 찾는 게 뭐겠어요? 술. 술을 찾아요. 그래서 배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술집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이다 보니까 자연히 술의 신을 숭배하게 돼요. 술의 신, 디오니소스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바커스라고도 하는. 우리가 피곤할 때 먹는 거 있죠? 박카스. 바로 이 술의 신에서 이름을 따온 거예요. 바커스.
에베소에 이 술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오래 전부터 생겨나서 터를 잡고 있었어요. 이 종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면, 신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다는 겁니다.
술에 취하면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빙빙 도는데, 그것을 신과 만나는 관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평상시에는 얻지 못하는 예술적 영감을 만취상태에서 얻으려고 합니다. 술에 취하면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온갖 희한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신이 주는 선물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뿐 아니라 수많은 도시의 예술가들, 문학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서 술을 마셔요. 이것이 이때 당시 에베소를 비롯한 도시들이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도 술이 친숙할 수밖에 없죠. 지금은 복음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 역시 술에 취해 흥청거리던 사람들이었어요. 술에 취하면 온갖 근심, 걱정을 다 잊고 황홀감을 맛볼 수 있으니까 술을 삶의 낙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던 교인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은 단호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덧붙이죠. 이는 방탕한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이 방탕하다는 것입니다. 방탕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방탕은 “아소티아”라고 합니다. 아소티아는 그대로 직역을 하면, “구원받지 못함” 이라는 말이에요. 구원받지 못함. 그래서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술에 취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술에 취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우리가 성찬식 때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때 정말 술이 약한 사람은 이 소량의 포도주만으로도 취할 수가 있거든요.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이 사람들도 다 구원을 못 받게 되겠죠. 그러나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믿음에 달려 있어요. 따라서 술 취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바울은 술 취하는 것이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술이 믿음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당시의 술 취하는 문화는 단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 잔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신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신과 소통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 또 황홀경의 쾌락을 얻기 위해서 행한 것이 바로 술에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술 취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었어요. 필수사항이었습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에 취해서 자제력을 잃고, 신이 주는 영감이라고 하면서 온갖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어요. 그것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베소 교인들이 보면서 자랐어요. 그래서 술은 당연히 만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고, 신과 교통하는 통로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교인들에게 술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술 취하는 것이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술에 취해 보셨습니까? 술에 취하면 몸이 어떻게 돼요? 균형을 못 잡고, 휘청거리죠. 혀가 꼬이고, 눈이 풀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알코올이 인체에서 분해되면서 몸에 화학작용을 일으키니까 몸이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돼요? 절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평상시에 맨정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술에 취하면 하게 돼요. 험한 말을 하고, 시비를 걸고, 난폭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끝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깨어있지 못해요. 절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말씀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서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16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세월을 아껴야 돼요. 우리 삶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다 놓치고 말아요.
주의 뜻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나에게 어느날 찾아오는 그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구원에 이르는 순례길에서 벗어나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분기점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꼭 술밖에 없을까요? 그렇지 않죠. 술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것들이 우리를 패망의 길로 인도해요. 돈, 명예, 권력,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절제하지 못하게 해요.
더 많은 돈, 더 높은 명예, 더 큰 권력, 또 이밖에도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어요. 그 수많은 유혹과 올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만이 그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술이 아니라, 돈이 아니라, 명예가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는 성령 외에 무엇으로도 충만할 수 없어요. 성령 외에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돼요. 그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선택사항이 아니에요. 필수사항입니다. 모든 성도는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돼요. 나를 채우는 성령, 나를 충만케 하시는 그 성령.
여러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9절부터 21절까지를 보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성도가 행하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들이 바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토록 지내면서 행할 모습들입니다.
19절을 봐 볼까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성도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서로 교제를 나누고, 삶을 나누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그 모든 순간에 그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에게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고, 세상에 취하고, 물질에 취한 사람은 그러지 못하죠. 이득을 챙길 만한 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고, 뒷얘기를 말해요. 그러나 성도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는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시편 86편 12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노래를 부르는 때는 원수들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던 때였어요. 생명까지 위태로운 그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찬송하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안할 때나 곤고할 때나,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고, 언제 어느 때이든지, 항상 전심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 우리가 이 모습을 가져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어서 20절을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 19절의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이에요. 우리가 어느 때나 전심으로 주께 찬송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느 일에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숨을 쉬는 것, 양식을 먹는 것, 길을 걷는 것, 그리고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이 모든 일에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때로는 시험과 역경이 찾아와서 지치고 곤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때에도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어느 때에든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감사하고 싶다고 해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감사할 수 있어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성령이 가득히 채워질 때,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1절 말씀과 같이 우리가 성령으로 채워지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복종이라는 것은 상대방 앞에 엎드려 그를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서로에게 복종해요. 위에서 지배하는 자가 없이, 모두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누구에게 성령을 주셔요?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가득히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하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구하여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주의 뜻을 잘 분별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시간, 특별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천국의 백성들과 같이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을 다하여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서로를 위하려 봉사하고 헌신하는 성령 충만한 광주서광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