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게 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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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사도행전 9:10-19
“다시 보게 된지라”
2020. 11. 25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사울이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눈이 멀었다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앞서서 9장 1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기독교 역사상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있었던 사건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사울의 회심 사건이죠. 교회를 박해하고 파괴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된 사건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서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던 유럽 사람들이 변화되고, 아프리카가 변화되고, 나아가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복음의 불씨가 번지게 되었습니다.
한 평생 이방 전도에 불을 지피고, 또 신약성경 27권 중에 열세 권을 기록한 그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의 시작은 바로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것처럼,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본래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붙잡아 오기 위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9장 3절에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일이 일어나게 돼요. 홀연히, 말 그대로 느닷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바울을 비추었어요.
사도행전 26장 13절을 보면, 이 때 시간은 정오였는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내려와 그와 그의 동행들을 둘러 비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 지금이야 형광등도 있고 LED도 있고 하니까 해보다 밝은 빛을 찾아볼 수 있지만, 사울이 살던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거든요. 해보다 밝은 빛이라는 것은 그들의 상식에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빛이 대낮에 나타난 겁니다. 햇빛보다 더 밝게, 더 강하게 내리쬐는 빛이 사울과 그의 동행들을 비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여기서 엎드러지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가 넘어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예요. 누가 그를 엎어트려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넘어트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지금 자신을 둘러 비치는 빛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 빛을 만났을 때, 이 빛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 하나님의 영광 외에 무엇이 해보다 더 밝을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해보다 더 밝게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빛이 비추는 그 즉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히 서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뵐 때 인간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울도 하나님 앞에서 즉시 엎드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들려올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했을 겁니다. ‘다메섹에 있는 예수추종자들을 잡아들이러 가는 길에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과연 나에게 어떤 칭찬을 해주실까. 어떤 복을 내려주실까.’ 이러한 기대가 사울에게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게 들려온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것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웬 말씀인가? 이 가냘픈 음성으로 나를 책망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사울은 혼란에 빠졌을 겁니다. 그래서 물어보죠.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랬더니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대답을 들은 사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그가 지금까지 가졌던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만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셨구나.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구나. 이 거대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의 파도가 사울을 덮쳤습니다.
그 파도 속에서 사울의 생각, 가치관, 신학의 틀이 깨어지고. 그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교회의 파괴자에서 교회의 설립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점에 사울의 육신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거예요. 사도행전 9장 8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끌려 가야만 했습니다. 분명히 빛이 사울만 비친 것이 아니고, 동행들에게도 같이 둘러 비추었고, 소리도 동일하게 들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소리는 들었으되 이해하지 못했고, 밝은 빛은 보았으되 사울이 만난 예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9장 7절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울만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왜요?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들어 쓰시려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막중한 사명을 주시려고 사울을 지명하시고, 이 다메섹 도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의 교인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 졸지에 예수님께 잡힌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2절에 보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자신이 예수께 잡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께 잡힌 사울, 그는 이제 전과는 같을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하기 위해서 열심으로 쫓아가는 삶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께 붙잡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삶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께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내 생각이나 내 열심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인생의 여정길을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가게 되는데, 본문 10절 바로 위에 9절을 먼저 보면,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넋 놓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밑에 이제 본문 10절과 11절에 보면, 주님께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1절 끝에 보면,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사울은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빛 앞에 드러난 자신의 추악함과 죄악을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하고, 내 모든 죄를 통회하며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의 기도를 드리는 중에 사울은 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주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어요.
오늘 본문 12절을 볼까요? 12절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멘.
지금 이 말씀은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인가 하면, “지금 사울이 기도하는 중인데 그가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앞을 보게 하는 환상을 보았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울이 환상을 보았다는 거예요.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아서 다시 보게 된다는 내용의 환상. 우리는 이 기록된 사건을 통하여, 지금 사울의 육신의 눈은 닫혀져 있지만, 그의 영의 눈은 활짝 열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보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동안에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는 명목으로 저질렀던 죄들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며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얼굴과 인자한 눈빛을 보며, 자신을 향한 무한하신 사랑이 영혼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위대한 성경 주석가인 매튜 헨리는 사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건을 두고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더욱 알려 주시려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력을 빼앗으셨다. 그가 오직 예수만을 보기 위하여 육신의 시력은 상실되어야 했던 것이다.”
매튜 헨리의 이 말처럼, 사울은 세상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죄인인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흘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주님은 아나니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불러 사울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나니아는 오늘 본문에는 “제자”라고만 설명하고 있지만, 사도행전 22장 12절에 보면,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곧 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명망이 높은 핵심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핵심 인물인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들으며, 특별히 제자로서 다메섹 교회 내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을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사울은 교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고 피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도 보면,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에 반박을 하잖아요.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또 밑에 14절에 보면,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도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를 핍박했고,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와서 이제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다 결박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찾아갈 수가 있겠어요. 마치 호랑이의 입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아나니아가 반대한 것이죠. 주님, 사울이라는 사람은 교회를 핍박하고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모자라서 다메섹까지 와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하고 반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15절에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울은 주님이 택하신 주님의 그릇입니다. 그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어떤 인생을 살았든. 그런 것은 주님께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울에게 계획하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은 15절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는 자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너무나 어렵고 험난한 일이에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사울이야말로 그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끝까지 해낼 수 있는 그릇임을 아셨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도 보면,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라고 하십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많은 고난과 역경의 환상을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겁니다. “아니 주님, 제가 어떻게 그런 고난을 이겨냅니까? 저 못합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하고 도망칠 겁니다.
당장 눈앞에 내가 매 맞는 모습이 보이고, 돌에 맞는 모습이 보이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당하고, 굶고 춥고 헐벗음 당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도망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도 지금 목사로서 주의 길을 가고 있지만, 제가 신학교 입학하는 날에 제 눈에 이런 환상이 보였다면, 저는 신학교 안 갔을 겁니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면 했지, 신학 안 했을 거예요. 그냥 도망쳤을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그가 당할 수많은 고난들을 보았음에도 도망치지 않았어요.
그가 본 고난들은 분명히 과거에 그가 교회를 향하여 저지르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가해자로서 저지르던 일들을 이제는 그가 당하는 피해자로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그 환상 중에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통해서 그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뜨겁게 타오르는 열심을 얻었을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을 찾아와 구속하신 주님의 그 은혜를 내가 갚을 수는 없지만, 나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또한 나 같은 죄인이라도 주님께서 나에게 기대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울은 도망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사울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있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나에게 다가올 어려움과 고난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너머에 있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또한 나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돌아오는 주일이 내년도 봉사자 지원을 받는 날이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구요. 그래도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사명이 있을 것이고, 전도하는 사명이 있을 것이고, 혹은 쾌적한 예배를 위하여 예배당을 청소하는 사명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또 시간이나 여건이 안 돼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같이, 세상을 보는 육신의 눈을 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면, 잠잠한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리라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내가 그 일을 감당하기로 결단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으로서 새로운 눈으로 교회를 보고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후에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던 그가 이제 새롭게 뜨여진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생각과 가치관과 신앙으로 세상을 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편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옛 사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의 장막이 벗어지고,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담대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고, 한없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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