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구하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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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9:57-62
“주님을 따르는 길”
2021. 5. 26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길에 만난 세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분도 있을 것이고, 혹은 내가 주님을 만났는지 모호한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 모두가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이십니까? 아멘.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길에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열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권위 있는 말씀에 매료된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동참한 것이죠.
이제 그 무리에 세 명의 사람이 함께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어요. 그런데 그들이 제자가 되었나요? 오늘 본문에 그들이 제자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결과는 쓰여 있지 않죠.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그들이 거절을 당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고자 했지만, 제자가 되지 못했어요.
왜 되지 못했을까요? 그들에게 어떤 신체적인 결함이나 인격적인 하자가 있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실 뿐더러, 가룟 유다까지도 제자로 부르실 정도로 사람의 성품에 좌우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 명의 사람을 거절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함께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로 받기를 거절하셨는가? 첫번째 이유는, 그가 주님이 가시는 방향과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다른 방향을 바라봄)
주님을 따르려면 마땅히 주님이 가시는 방향을 함께 보며 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전혀 엉뚱한 곳을 보고 있어요. 오늘 본문 57절을 봐 볼까요?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지금 이 구절만 보면,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내가 기꺼이 주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주님이 맡기실 일들을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열심이 느껴지는 결단의 말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결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어, 그래! 반갑구나! 내 제자가 되어서 나를 따르거라!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참 잘됐다!’ 이렇게 반응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8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이 갑자기 보금자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한낱 짐승에 불과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다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나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여우와 새도 있는 집이 나는 없다는 거예요. 기초적인 생활이 보장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것이 바로 나의 현실이라는 거예요.
겉에서 보기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화려하게 보일 겁니다. 제자들이 수발을 들고, 수많은 무리가 존경하며 환호를 하니까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겠어요. ‘야, 정말 멋있다. 주님을 따르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대접 받고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첫번째 사람은 이러한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방향과 같을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시다고 했어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고 계십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어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예수님은 그것을 향해서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길 어디에 풍요가 있고, 보장된 생활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저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하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실 뿐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실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보시는 그 방향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에서 오는 현실과 생계와 고난, 이러한 문제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그 방향을 끝까지 지켜야 돼요.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하지만 첫번째 사람은 그것을 감당할 마음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던 것은 주님의 길에 편승해서 유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이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을 봐 볼까요?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어요. 이 당시 서기관은 전문적인 율법학자로서 뭇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위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풍요로운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눈에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이는 거예요. 내가 가진 알량한 명예와 재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이 저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영광에 동참하고 싶고, 나도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다 알고 계셨어요.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길에 우리가 기대할 것은 명예도 아니고, 풍요도 아닙니다. 오직, 나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에 나로 인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작은 믿음의 씨앗이 뿌려져 언젠가 그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될 것을 기대하며 주님과 한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이유는 그가 제자리에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2. 제자리에 멈춤) 주님이 가시는 길에 함께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 그대로 멈추었어요.
오늘 본문 59절에 보면, 두 번째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찾아온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렇다고 거부한 것은 아니죠. 이 사람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잠시 멈추겠다는 거예요. 시간을 좀 달라는 겁니다.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어요? 내 아버지를 장사해야 하는, 인륜적으로 중대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죽은 친척, 그것도 친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그 일을 행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 요청을 한 겁니다.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내가 주님을 안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 중요한 일을 끝마쳐 놓고 홀가분하게 와서 따르겠다는 말이에요. 전혀 나쁠 것이 없는 말이죠.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반응하셔요. 6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막으십니다. 네가 장사지내지 말고 죽은 자들에게 그것을 맡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나, 싶은 매정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버지 장례도 못 치르게 하시나. 장례 다 치르고 나면 그때 와서 따르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못 기다려주시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정하고 매정한 분일까요? 누구보다 온유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아무 이유도 없이 장례를 막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셨어요. 이 사람은 지금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매우 중대한 일을 위해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장사 지내는 일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한 말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앞으로 또 자기가 생각하기에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에도 멈춰 서리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정한 분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냉정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보다 앞설 수 없어요.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아버지를 장사 지내러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것은 단순히 장사 지내러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네가 세상의 일 때문에, 인륜의 일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춰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의 안에서 영적 가치 질서를 바로세우라는 것입니다.
그 질서가 바로서지 않고서는 언제라도 지금처럼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아요. 제자리에 멈춰서는 주님과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저만치 가시는데, 나만 혼자서 서서 내 일 다 보고, 내 사정 다 살피고 나서 뒤늦게 쫓아가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기회를 놓치고 말아요. 이 두 번째 사람도 기회를 놓쳤어요. 멈춰 섰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우리 안에서 영적 가치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 제자로 받기를 거부하신 이유는 그가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3. 뒤를 돌아봄) 이번에 등장한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처럼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를 따르긴 따르겠지마는 먼저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본문 61절을 보니까,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주님과 다른 방향을 보는 것도 아니고, 제자리에 멈춘 것도 아닙니다. 앞의 두 사람에 비하면, 이 사람이 요청하는 것은 양호해요. 가족과 아주 잠깐 작별인사만 하고 오겠다고 하거든요.
헛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잠깐이면 됩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요청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거부하십니다. 그것조차도 안 된다고 말씀하셔요. 오늘 본문 62절 말씀인데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아멘.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여러분은 손에 쟁기를 잡아 보셨습니까? 밭에 씨를 뿌리기 전에 일정하게 골을 파야 하는데, 그것을 쟁기로 합니다. 소에 쟁기를 매달아가지고, 앞에서 소가 가면 뒤에서 쟁기로 일정하게 골을 파요.
물론 요새는 쟁기를 사용하지 않죠. 다 기계로 하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제가 경운기를 몰 줄 압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제가 경운기 모는 법을 배워가지고 밭에서 골을 팠어요. 그런데 이게 기계다 보니까 잠깐만 한눈을 팔면 엄한 데로 가버립니다. 뭐 잠깐 한눈 판다고 똑바로 가는 경운기가 가기는 어디로 가겠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밭에 돌멩이도 많고 땅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손잡이를 꽉 잡고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덜컹덜컹 하면서 순식간에 경로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내가 경운기를 몰고 갈 방향만 집중해야 합니다. 골이 정확하게 파졌는지 안 파졌는지 확인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에요. 뒤를 돌아보면 뭐 하겠어요. 이미 경운기는 앞으로 가고 있는데. 골이 삐뚤어져 있다고 해서 경운기를 뒤로 돌릴 수는 없어요. 앞으로 가고 있는 이상 끝날 때까지 앞으로 가야 돼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라는 거예요. 지금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라는 겁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기로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가족과 작별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고, 주님을 따르는 그 길에 동참하기에 앞서서 작별을 함으로써 앞으로의 사역여정에 결단이 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앞으로 가고 있는 경운기는 경로에서 벗어납니다. 똑바로 된 골을 파지 못해요. 제대로 된 골을 파지 못한다는 것은 농부에게 있어서 사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끝가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수정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이 작은 실패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루 종일 실수를 바로잡는 데만 열중하다가 밭 한 마지기 끝마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사람도 바로 그러한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가족과 작별하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는 것이 인간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한 번의 뒤 돌아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이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가족이 만류할 경우에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한 번 뒤돌아본 사람은 미련이 있다는 것이고, 미련이 있는 사람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뒤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미련이 있는 사람은 결국에 가정에 발목이 묶이게 돼요. 예수님은 그러한 마음상태를 꿰뚫어보셨기 때문에 이 세 번째 사람 역시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아요. 언제라도 뒤를 돌아보고 경로에서 이탈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느라 엉뚱한 데로 가고 맙니다. 정신을 차리고 합류하더라도 또 뒤를 돌아봐요. 골이 잘 파졌는지 확인하려는 그 행동이 오히려 더 엉망으로 만드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분명하게 앞을 향하여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앞서 말씀한 것처럼, 영적 가치의 질서를 바로세워야 돼요. 주님께서 나에게 사명의 쟁기를 쥐어주셨다면, 그 잡은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세워야 돼요. 그것이 바로 제자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길에 만난 세 사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신 이유는 첫 번째로, 그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가 제자리에 멈추었기 때문이고. 세 번째로, 그가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면, 그는 점차 주님과 떨어져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멈추어 서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영적 가치의 질서를 바로세움으로써, 무엇이 나에게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를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이 앞만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명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미련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과 같은 방향을 보며, 멈춤이 없이 주님과 동행하고,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는 그러한 자만이 주님의 제자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러한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허용하시고, 인정하여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거룩한 주의 제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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