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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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소망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깨워 예배에 나아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님들에게 크신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제 함께 보았던 3장의 말씀으로부터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애가의 화자는 1장부터 지속적으로 지금 현재 자신에게 놓인 상황, 즉 예루살렘의 패망과 황폐화를 슬퍼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이전의 영광과 비교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의 현실을 슬퍼했습니다. 전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예 적막하게 변해버렸고, 전에 가깝게 지내던 나라들은 이제는 아예 관심조차 없고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청할 곳도, 위로를 받을 곳도 없음을 한탄했죠.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얼마나 큰 진노를 쏟아내시는지를 노래하였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의 원수와 같이 그 모든 죄악에 대해서 처참하게 심판을 하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3장의 전반부에서는 이 모든 상황들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겪는 고통을 여러 비유들을 통해 나타내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고, 뼈를 꺾으시고 화살에 맞고 조롱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애가의 화자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절망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오늘의 첫 구절인 19절에서 나타납니다.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으로 비유하는 것이죠. 쓴 쑥과 담즙과 같이 그 고난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쓰고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쓴 쑥과 담즙을 기억하면 너무나도 낙심이 된다고 말을 하죠.
지금껏 말했던 것처럼 나라가 황폐화되었고, 아무도 도울이는 없고, 혼자 남아 버려진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분위기가 21절에서 급격히 변화하게 됩니다.
21절을 볼까요?
예레미야애가 3:21 (NKRV)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쑥과 담즙을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지금까지의 고통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던 쑥과 담즙이 소망으로 변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쓴 쑥과 담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2:8–11 (NKRV)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 유월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월절은 어떤 절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며 모진 고난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그를 통해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출애굽, 그 모든 재앙의 마지막 열번째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을 감사하며 기념하는 절기이죠.
그 유월절 당시에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함께 먹었던 쓴 나물이 쑥과 담즙으로부터 떠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을 통해 백성들은 무엇을 상기시키게 되었을까요.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잊지 않으셨고, 분명 백성들을 출애굽으로 이끄신 것처럼, 반드시 이 고통속에서도 구원하실 것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2절부터 화자의 노래는 희망과 소망의 노래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너지고 낙망하고 고난을 당하나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에 우리는 절대로 진멸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4:6–7 (NKRV)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이 본문과 22절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인자라는 단어의 원어가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헤세드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순한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언약적 사랑을 지칭하는 것이죠.
비록 백성들이 그 죄로 인해 고통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완전히 끝내지 않으시고 다시금 헤세드의 사랑으로 무한하게 무궁하게 백성들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아침마다 새롭게 끊기지 않고 그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며 하나님은 그의 성실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어지는 24절에서 화자는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기업으로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나는 상속 받을 땅들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이죠. 그렇기에 기업은 한 가족이 그들의 삶을 믿고 의지할 토대가 될 것입니다.
화자는 그 기업을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죠. 내가 믿고 의지할 바가 이제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도 비슷한 고백이 나타납니다.
시편 142:4–6 (NKRV)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이 시편은 표제를 보면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기도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며 위기 속에 있을 때 지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당시 다윗 역시도 아무도 도움받을 이가 없고, 모두가 나를 노리기만 할 때,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의지할 분깃, 기업이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애가의 화자도 동일한 고백을 한 것이죠. 지금 내가 이렇게 고통 가운데 있고,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지만, 인자와 긍휼이 크신 주님, 오직 주님만이 나의 의지할 기업이 되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비단 고통받는 애가의 화자뿐만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떤가요. 어쩌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서도 이 화자와 같은 아픔과 고통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 내 고통을 세상에 외쳤으나 그들은 다 외면하거나 나를 속였고, 그랬기에 도움을 받을 곳조차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 있을수도 있겠죠.
그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은혜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아침마다 늘 새롭게 부어집니다.
우리의 의지할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지식도, 재물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도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그리고 매일마다 일하시는 그 성실하심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이런 것들로 나의 기업을 삼지 마시고, 오직 주님을 나의 유일한 기업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을 기업으로 선포하고 맡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화자 역시도 하나님을 나의 기업으로 선포하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 구절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일하심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며 잠잠히 있어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25절에서 기다리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다. 26절에서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9절에서는 입을 땅의 티끌에 대라고 말하며 잠잠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2절과 33절을 통해서는 지금 현재의 고난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32–33 (NKRV)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이 구절에서 화자가 고백하는 하나님께서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고난을 내리심이 우리가 정말 그 고난으로 온전히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고난이 임한 이유를 하나님의 공의로 설명합니다. 갇힌자들을 밟는 것,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 다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죄악들이다.
우리가 받는 이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도 아니고 결국 우리 스스로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삶에서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은 결국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 허락하심은 우리의 죄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악한 세력의 공격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모든 이유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멸망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순간들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 안에 깨어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쩌면 이 고난이야말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다시 주님께로 나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주님께서 계획하신 선하신 계획대로, 주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근심할 것이지만 그 근심을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성실하심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분명히 억울하고 답답한 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 모든 우리를 향한 죄악들도 그의 뜻에 맞게 분명히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 어렵고 힘든 삶일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을, 성실하심을 믿고 묵묵히,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분명 애굽에서 백성들을 인도해내신 것처럼, 그의 계획 안에, 가장 완벽한 때에 역사하시며 그의 선하심을 세상 가운데 보이실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많은 이들이 이 애가의 화자와 같은 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죠. 지금 보여지는 세상은 어떤가요. 입시는 힘들어지고, 취업도 하늘의 별따기고, 결혼조차도 쉽지 않습니다. 출산은 더욱 그렇죠.
얼마나 힘들면 우리나라를 지옥에 비유하는 신조어가 유행을 하겠습니까. 정말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앞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희망이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어쩌면 이 애가의 화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우리일수도 있겠죠.
그 모습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주변에 많은 선배 목사님들께서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는데요, 그중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앞으로 목회가 어렵다’라는 말입니다.
정말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이전 8,90년대의 한국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교회의 모습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모두가 한번쯤은 교회에 와서 많은 것들을 누리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모두가 교회를 욕하고 비방하고 있죠.
기존의 성도들도 삶에 지쳐 이전의 열정을 보이기는 어려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명 교회 안에서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야말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모두가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좌절하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고난을 쑥과 담즙으로 삼아 잠잠히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측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어 역사하실 때가 훨씬 많았죠.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과 전문가들이 희망보다는 절망을 말하는 이시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분명 그의 인자하심으로, 그의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망을 마음에 품고 세상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도 희망을 말하지 않을 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이라는 희망과 소망을 세상에 나아가 선포한다면,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그 소망을 지키며 살아간다라면,
우리를 욕하고 비방하던 세상도 분명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말그대로 선교적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자리에 모인 모든 우리 성도님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고 각자의 삶 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삶 속에서 근심과 고난이 있을지 모르나, 이 또한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때에 알맞게 선하게 이루실 것임을 믿고, 잠잠히, 묵묵히 기다리며 하나님과 함께 발맞춰 나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시간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고난의 삶 속에서도 주님 주시는 헤세드의 사랑, 그 소망가운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구요, 또한 가지고 나오신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서 함께 전심으로 기도하시고 돌아가시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