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 새벽기도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0 viewsNotes
Transcript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양심의 증거와 소망(12-14절)
고린도후서는 어제 살핀 1:1-11절이 서론(도입부)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부터 본론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13장의 마지막 3절이 결론(종결부)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 자신의 전도여행이 변경된 것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가 주된 내용입니다.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늘 본문의 소제목이 ‘고린도 교회 방문을 연기하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의 본론에서 가장 먼저 말한 것이 자신의 고린도 교회 방문이 연기된 것에 대한 해명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이 거짓으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선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관계를 맺은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심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룩함’은 ‘성실함’, ‘정직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진실함’은 ‘위장하지 않음’, ‘한결같음’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구워 만들 때 금이 가게 되면 폐기 대상입니다. 고대에 도자기를 만들어 팔던 사람이 금이 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밀랍으로 보수해서 팔곤 했습니다. 투명한 밀랍으로 보수한 도자기는 맨눈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자기가 온전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때 그것을 들어서 태양 빛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밀랍으로 보수한 곳은 까맣게 나타났습니다. 그런 부도덕한 상인이 있었기 때문에 선량한 상인은 자기가 만든 도자기에 ‘밀랍 하지 않은’이란 뜻의 라틴어 ‘sine cera(시네 세라)’를 붙여서 팔았습니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sincere(진실한)’이 나왔습니다. 영어 편지 끝에 ‘Yours sincerely’라고 쓰는데, 그것은 ‘나의 삶과 마음은 밀랍으로 때우지 않은, 순결하게 당신의 것입니다’의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함으로 맺은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시기에,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관계를 맺은 것을 자랑하는 두 번째 이유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 ‘인간의 법칙’, ‘이기심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육체의 지혜 아래에 있을 때는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일에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까지 가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것 역시 바울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양심이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양심(쉬네이데시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함께 보는 것’입니다. 양심은 ‘함께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사는지 압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양심적으로 사는지, 그렇게 살지 않는지는 다른 사람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고린도 교회가 증인이 될 수 있을 만큼 보았기 때문에, 교회가 자신을 알고 있고, 그것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전서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린도전전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내는 고린도후서의 내용이 이전의 보낸 서신의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전에 보냈던 내용을 새롭게 환기하여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 생활은 늘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날마다 새로운 음식을 찾아다니며 외식하는 것으로 유지되지 아니합니다. 일상적으로 먹은 음식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성경 공부의 교과서는 성경 66권이 전부입니다. 과거에도 66권이 전부였고, 지금도 전부이고,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전부일 것입니다.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완전히 알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데....”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을 실제로는 몇 % 정도 알겠습니까? 70% 정도 알겠습니까? 50%? 30%? 아마 10%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길러도 그 자식을 다 알지 못하고, 심지어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불리는 부부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가끔 듣게 되는 말이 “내 남편이/내 아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내가 아는 것을 부분적이라는 것을 온전히 수용할 때 서로의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날에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서로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서로서로 온전히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고린도 방문 계획 변경에 대한 해명(15-22절)
(15-16)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고, 1년 6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린도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있다고 생각하여, 마게도냐(데살로니가와 빌립보가 있는 지방, 지금의 그리스 북쪽 지방)로 갈 때 그리스의 남부 고린도를 들리고, 또 마게도냐에서 돌아올 때 들리겠다고 했었습니다. 그것이 ‘두 번 은혜’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고는 계획이 변경되어 마게도냐가 경유지가 되고, 고린도가 목적지가 되어서 고린도에서 겨울 동안 지내려고 했습니다(고전 16장).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이런 계획을 세울 때 경솔했겠습니까?”라는 의미는 ‘경솔하게 계획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인데, 경솔하게 그렇게 한 것이라고 비난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경솔하다’는 ‘변덕부리다’입니다. 즉 그렇게 계획에 변덕을 부리는 것을 보니, 바울은 경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이 바울을 그렇게 깎아내린 것입니다.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미쁘다’는 ‘신실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 전도여행 계획도 하나님의 신실함 안에서 ‘예’였고, 계획이 변경된 것도 하나님의 신실함 안에서 ‘예’라는 의미입니다. 뒤집으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계획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계획을 끝까지 밀고 갈 때도 있지만, 상황과 조건, 마음 상태가 달라져 변경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직선만 있지 않고, 곡선도 있습니다.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실루아노는 ‘실라’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예’만 하시는 분이시고, ‘아니오’는 하지 않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예스)’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 주님을 본받아서 ‘아멘(예스)’하여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과 계획이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과거에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을 치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방문 계획이 변경된 것은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는다’라는 것은 자신이 하는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9절부터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주어를 쓰다가 이 구절에서 ‘나’라는 일인칭 단수 주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 문장에서는 주어가 인칭대명사일 때는 주어를 사용하지 않고, 문장을 씁니다. 왜냐하면 동사의 형태만 보아도 주어를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어가 인칭대명사일지라도, 그 주어를 강조할 때는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의 세상의 유일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을 정도로 중심을 다해서 강조하는 것은, 고린도 방문 계획이 변경된 것은 자신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새번역 /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을지라도, 교회를 지배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돕는 관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도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변덕스럽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를 아끼고 도우려고 했던 것은 그의 삶이 늘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그의 삶이 전적으로 주님께 내어 드린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바울의 삶이 주님을 향해, “예”라고 응답하므로, 그를 통해서 초대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새로워졌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고, 우리의 공간을 주님께 내어 드림으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 삶이 새로워지기를 축복합니다.
